중앙연구원은 남경국민정부의 성립과 함께 전국적 학술기구를 연계하고 대표하는 최고의 학술기관으로 기대를 받으며 출범하였지만 성립의 계기는 정치적인 협상이었고 따라서 학술의 정치적 간섭을 배제하고자 한 채원배의 설립취지를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중앙연구원 설립은 서구 학문연구의 분류와 방법을 제도화하여 국제적인 수준의 학술연구를 성취하고자 하였던 점에서 국가위탁의 연구를 진행하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더욱이 일본의 침략이 심화되고 국가전략에 따른 연구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연구소의 재정지원 또한 차등을 두게 되었다. 그러나 협의의 과학에서 인문학을 포함한 학술연구기관으로 확장된 중앙연구원의 연구소에는 史語所가 포함되게 되었고 1935년까지 인원수와 규모에서 가장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느슨한 형태의 학회나 잡지를 통한 것이 아닌 전문연구자를 둔 조직적인 기구를 설립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서구 근대 역사학의 제도적 확립을 통해 서구 漢學의 수준에 부합하는 연구역량을 확보할 기구로서 즉 과학적 동방학 연구를 가능하게 할 史語所가 설립된 것이었다.
사어소는 書院방식의 개인연구가 아닌 집단연구체제를 구축하였고 이는 서구 학술기구의 체제를 따른 임금을 받는 전문적 연구자 기구로 자리잡게 하였고 학술연구의 질적 제고를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데 주력하였다. 이는 북경대학 사학과 및 타대학 사학과의 교과과정과 연구방법에도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즉 학술과 국가주권의 관계에 대한 인식을 공유했던 蔡元培와 胡適 등의 재정적 지원을 통해 소장 傅斯年은 대규모의 발굴과 사료의 수집과 정리를 진행했고 역사학은 사료학이라는 해석을 정립해서 史料學派를 형성하면서 더욱 뚜렷해진 것이며 사료학파는 史語所의 활동을 통해 형성되었다. 이는 <輯刊>의 논문발표, 북경대학 과정 설치, 학생 교육, 중앙연구원 선발기준, 중앙연구원 조직체계와 급여체계 등을 통해 이루어졌다. 또한 史語所의 연구방향이 역사학 전문가 양성의 방향을 제시하여 근대 역사학의 체제를 제도화하는데 영향을 끼쳤다.
史語所는 동방학의 수준을 높인다는 목표로 중국 내 사료의 발굴과 발견 및 정리, 보존 등을 주요한 활동으로 전시기간 동안까지 활발하게 진행하였다. 이는 국가의 주권보호의 개념과도 연결되어 민족본위의 역사학 수립의 목적도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중앙연구원의 학술독립 즉 정치적 영향이 배제된 연구의 진행은 評議會의 성립과 院士의 설치를 통해 강구되었지만 국가의 학술통제의 경향, 교육부의 합병 시도 등 정치적 간섭에 놓여 있었다. 또한 경제적 지원도 여의치 않아 과학연구의 내실을 기하고 연구소를 확대하는 계획도 진행하기 쉽지 않았다.
그러나 史語所는 평의회와 원사설치의 과정에서 다수의 평의원과 원사가 선출되면서 역사학의 학문권위를 보장받게 되었고 역시 제도적 역사학의 내용에 영향을 줄 수 있었다. 또한 중앙연구원의 학술독립을 유지하기 위한 원사의 선출에서도 정치적 성향을 배제하려 하였다. 그러나 중앙연구원의 국가기관으로서의 위상과 관련하여 사어소는 역사관이나 역사인식의 문제에서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과 연구의 대상 또한 중국에 국한되었던 것 등은 한계일 수 있다. 그럼에도 중국의 국가건설과정과 관련되어 근대역사학의 제도화를 구축하는데 역사어언연구소의 역할은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