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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학회 중국사연구 중국사연구 제110호
발행연도
2017.1
수록면
103 - 145 (43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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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르하치 시기부터 만주는 고질적인 식량난에 시달렸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홍타이지는 明의 변경을 공격하여 물자와 식량 등의 전리품을 획득하려 하였다. 天聰 원년(1627) 조선을 침공한 丁卯胡亂도 당시 극심한 기근과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만주의 불가피한 선택으로 보기도 한다(Frederic Wakeman Jr., 1985, p.163). 황제에 오른 홍타이지는 계속해서 중원 침공에 나섰고 약탈의 범위와 규모를 더욱 확대해 나갔다. 그러나 이때 淸軍의 중원 침공은 모두 山海關을 피해 華北으로 우회하여 長城의 다른 관문을 넘어 이루어졌다. 山海關을 확보하지 못한 상황에서 淸軍은 먼 길을 우회해야 했고, 너무 길어진 행군 경로로 인해 불의의 습격을 받거나 퇴로가 쉽게 차단당할 가능성도 상존하였다. 결국, 홍타이지는 수차례 중원 침공에서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음에도, 진정한 의미의 정복 전쟁으로 발전시킬 수 없었다. 山海關을 넘기 위해서는 새로운 인물과 새로운 변수의 등장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崇德 8년(1643) 8월 홍타이지가 盛京에서 돌연 사망하면서 중원 침공은 잠시 교착 상태에 빠졌다. 이때 도르곤은 풀린을 順治帝로 추대하면서 淸 朝廷 내부의 권력 투쟁을 최소화하였다. 順治 원년(1644) 도르곤은 급격히 변화하는 중원의 상황과 大學士 范文程의 건의를 받아들여 4월 8일 다시 한번 중원 공략에 나섰다. 本稿에서는 최근의 연구 방법과 당시 淸의 병력 차출 상황에 근거하여 淸軍의 구성과 출정 병력 규모를 구체적으로 따져 보았다. 淸과 조선의 實錄 등 史料에 보이는 수십만에 달했다는 수사적 표현과 달리, 이번에 차출되어 출정한 정규 병력은 약 4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구체적인 병력 추산을 통해 도르곤의 출정이 이전 홍타이지 시기 중원 공략이나 조선과의 전쟁보다 특별히 더 많은 병력을 동원했다거나, 北京을 점령하고 중원의 왕조를 세우기 위한 ‘건곤일척’으로 포장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점을 확인하였다. 또한, 本稿는 기존의 史料를 가능한 비판적으로 읽으면서 攝政王 도르곤이 이끈 淸軍의 구체적인 진군과 전투 상황을 재구성해 보았다. 출정 직후만 하더라도 도르곤은 여전히 淸軍에게 가장 익숙했던 華北 우회 경로를 따라 진군을 시작했고, 빠른 시일 안에 李自成이 점령한 北京에 도달하여 전리품을 온전히 확보하고자 하였다. 뜻밖에도 4월 15일 山海關을 지키고 있던 吳三桂에게 지원 요청의 서신을 받은 도르곤은 결단을 내려 신속하게 北京으로 진공하려는 애초의 계획을 수정하고 山海關으로 진군의 방향을 돌렸다. 급박한 행군 끝에 淸軍은 4월 21일 山海關 인근에 도착하였고, 투항한 吳三桂의 군대와 연합하여 4월 22일 山海關에서 李自成의 군대를 대패시켰다. 山海關 전투를 기록한 淸 측의 사료는 淸軍의 활약을 미화하고 吳三桂의 역할을 축소하는 등 당시의 정황을 왜곡한 측면이 발견된다. 그러나 山海關 전투의 승리는 결국 돌발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하고 이를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발전시킨 도르곤의 빠른 판단과 선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山海關 전투를 승리로 이끈 도르곤은 이튿날 4월 23일부터 패주하는 농민군을 추격하며 北京으로 진군하였다. 도르곤은 행군 중에 明의 관원과 백성에게 투항을 권유하고 수하 장병의 기율을 정돈하는 令旨를 수차례 내렸다. 그 결과 淸軍이 경유하는 州縣마다 관원들이 백성을 이끌고 투항해 왔고, 吳三桂의 발 빠른 초무 공작 덕분에 불필요한 유혈 충돌을 피할 수 있었다. 淸軍과 吳三桂의 군대가 北京으로 들이닥칠 것을 두려워한 李自成의 농민군은 4월 29일 北京을 약탈하고 불태운 뒤 빠져나갔다. 이 소식을 접한 도르곤은 행군의 속도를 더욱 높여 밤낮으로 달린 결과 5월 2일 마침내 北京에 입성하였다. 實錄과 內國史院滿文檔案 등 淸 측의 기록에 나타난 淸軍의 행군은 매우 순조로워 보이지만, 조선 측의 『심양일기』에는 무리한 행군의 긴박함과 고단함이 생생히 드러나 있다. 淸軍의 北京 진군은 山海關 入關 이후 매일 100리 이상을 내달린 강행군이었고, 도르곤은 경유하는 도시에 주둔하여 按撫 활동을 벌이거나 부대를 정비하는 등의 여유를 조금도 가지지 못하였다. 빈 北京을 얻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었고, 하루라도 빨리 北京을 접수해서 전리품을 최대한 확보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北京 입성의 주인공이자 가장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사람은 바로 도르곤이었다. 여진 부락을 국가로 결집한 아버지 누르하치도, 만ㆍ몽ㆍ한의 추대를 받아 황제에 오른 형 홍타이지도 이루지 못한 업적인 山海關을 돌파해낸 도르곤은 드디어 北京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상 살펴본 淸軍의 入關과 北京 입성은 미리 계획되고 준비된 것이라기보다는, 李自成의 北京 점령과 吳三桂의 투항이라는 우연적 요소에 도르곤이 적극적으로 반응함에 따라 거둔 ‘목표의 초과 달성’에 가까웠다. 그 결과 1644년, 불과 반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동안 北京의 주인은 明의 崇禎帝 - 順의 李自成 - 淸의 도르곤과 順治帝로 바뀌었다. 이후 淸이 北京을 그들의 새로운 수도로 공포한 것은 다른 한편으로 이전 北京의 주인이었던 세력들, 즉 明의 잔당인 南明 정권과 농민군의 잔당인 大順 정권에 대한 정면 도전을 선언하는 의미가 있었다. 그들도 한때 北京의 주인이었지만, 새로 北京의 주인이 된 도르곤과 順治帝는 자신들이야말로 유일하고 최종적인 北京의 주인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전쟁을 시작해야 했다. 비록 현실적으로 어떠한 정권도 당장 전국을 통일할 수 있는 결정적이고 압도적인 힘을 가지지 못한 상황이었지만, 주지하다시피 이후의 상황은 결국 北京을 장악한 淸에게 점차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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