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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민족문화연구 민족문화연구 제72호
발행연도
2016.1
수록면
129 - 171 (43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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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조선에 “입조”하던 여진족 수장 童猛哥帖木兒가 1405년 명에 “입조”한 것을 중화/소중화 중심주의적 관점에서만 이해해온 기존 해석을 비판하기 위해, 당시 조선과 명과 童猛哥帖木兒 사이에서 전개된 역동적 관계성을 재해석한다. 명이 여진을 포섭하여 요동과 만주에서 중화중심주의의 질서를 만드는 과정은, 일견 명이 일방적으로 주도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오히려, 元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이미 고려 말 이후 조선왕실이 여진과의 관계를 통해 압록강/두만강 유역에 구축하고 있던 조선중심적인 지역질서를, 명이 빌려서 전유하는 방식을 통해 진행된 것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역사적 맥락은, 중화중심주의의 단순한 수직적/일원적 위계질서 안으로 환원되지 않는 균열의 지점을 제공함으로써, 동맹가첩목아와 같은 여진족 지도자들이 소위 “인신무외교”의 원칙에 입각한 중화중심주의의 일원적 위계질서의 바닥에서 벗어나, 오히려 명과 조선 양쪽 모두를 더 많은 선택의 기회로 활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동맹가첩목아의 명 “입조”는 명을 중심으로 하는 중화중심주의적 위계질서의 공고화처럼 보이지만, 그 “입조”라는 결과와 분리될 수 없이 연결된 明과 朝鮮과 동맹가첩목아 사이의 관계성과 그 역사적 맥락은, 그 중화중심주의적인 질서 또는 위계라는 것이 오히려 그것이 “반주변부(조선)”나 “반야만(여진족)”으로 정의하는 타자들 없이는, 만들어지는 것조차도 불가능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中華”와 “小中華”와 “野人”의 교차로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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