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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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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대구사학회 대구사학 대구사학 제125권
발행연도
2016.1
수록면
169 - 207 (39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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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은 윤치호의 고향이자 대토지 소유지로서, 그는 일제시대에만 78회 아산을 방문했다. 이 과정에서 표현된 지역사회 인식과 활동에 대한 연구는 윤치호의 조선 현실인식을 파악하는 데, 대지주로서 지위를 조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해평윤씨가는 19세기 초 아산 둔포 신촌을 근거지로 부를 축적했다. 윤웅렬·윤영렬이 관직에 진출하면서 정치적 권위를 동시에 갖게 되었고 지역유력자로 부상했다. 윤영렬은 청일전쟁 당시 아산 주둔 청군이 조선 정부에 요청한 물자 징발 요구를 대행했다. 그러나 이 가문은 동학농민전쟁, 의병운동 당시 지역민의 봉기를 피해 급히 몸을 숨기기도 하였다. 윤웅렬의 사망 이후 가문과 토지에 대한 관리책임을 맡은 윤치호는 아산을 낙후한 공동체로 부정적으로 인식했다. 지역민이 처한 현실을 개인의 문명적 의식 부재로부터 찾았고, 그에 따라 해결책도 개인의식의 성숙과 자구적 활동에 맞추는 등 개인책임론을 내세웠다. 윤치호는 10여 명의 토지 관리인을 두고 대토지를 관리하는가 하면, 아산군수·헌병분견소장, 지역 내 조선인 유력자들과 활발히 교류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일제 농업정책을 수용하고 토지 매입을 이어갔다. 또한 선산에 대한 광산채굴권 인허가를 막기 위해 총독으로부터 온양경찰서 관계자까지 폭넓게 접촉했다. 그는 지역민에게 개인책임을 강조했지만 가산 유지를 위해 식민권력과 지주자본가 네트워크를 활용했다. 윤치호는 아산에서도 교육·사회사업에 참여했고 지역민은 송덕비를 세웠다. 그러나 칭송의 진정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것은 3·1운동 당시에도 해평윤씨가가 지역민의 비판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반응은 개인책임론을 바탕으로 한 윤치호의 아산지역사회 개조론과 활동이 지역민으로부터 끊임없이 도전 받았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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