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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불교미술사학회 불교미술사학 불교미술사학 제27권
발행연도
2019.1
수록면
185 - 222 (3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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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山西의 小形佛敎石窟에 관한 연구의 일환으로, 그 중 보존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羊頭山石窟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羊頭山石窟은 현재 총 9굴이 확인되는데, 북조시기에 조성된 예는 제3~8굴이며, 석굴의 규모나 불상의 구성 등에서 주요 석굴은 제3굴과 제5굴로 판단된다. 본고에서는 먼저 羊頭山石窟의 현황을 살펴보고, 主室, 如來像, 力士像의 양식과 형식적 특성을 山西지역 불교조상 및 北朝 도상과의 비교를 통해 살펴보았다. 그 결과 羊頭山石窟의 제3굴의 주실 입구 좌우에 배치된 여래입상과 제5굴의 이불병좌상감은 北魏가 和平年間(460년경) 大同에 曇曜五窟을 개착한 이래로 北魏 불교의 융성기인 太和中期 무렵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특히 불보살의 착의법이나 불감의 구성 등에서 北魏 전반기 雲岡石窟의 영향이 농후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羊頭山石窟 중 장방형 主室의 형식, 三尊像의 구성, 여래상의 漢化式 착의법은, 北魏후기의 雲岡의 3기 석굴 및 龍門, 鞏縣石窟 등의 조상과도 공통점이 확인되기 때문에 북위의 낙양천도 이후의 漢化政策이 불교조상에 반영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한편 羊頭山石窟에는 제3, 6굴을 제외한 북조석굴에서 역사상을 주실 좌우에 쌍으로 배치하고, 역동성과 사실적인 근육 표현이 강조되어 있다. 이러한 역사상이 北魏후기의 龍門石窟 등 6세기 중반부터 낙양과 그 인근 지역에서 확인되는 점에서 羊頭山石窟도 이러한 새로운 역사상의 영향 하에서 성립된 것으로 추정했으며, 일부 좌우가 양식적인 차이를 보이는 것은 북조시대 역사상의 과도기적인 전개 양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했다. 본고에서는 羊頭山石窟의 역사상에서 확인되는 이러한 변화를 北魏의 洛陽遷都로 인한 龍門石窟 및 洛陽 인근 석굴의 조상 양식을 적극적으로 수용했기 때문으로 추정했다. 산서의 최남단에 위치하는 高平은 북위 孝文帝 시기에 淸化寺가 건립되는 등 일찍이 명승이 모여든 불교 성지로서, 북조만기와 수대에는 저명한 고승인 慧遠이 머물며 수행하던 곳으로 불교가 상당히 융성했던 곳이었다. 또한 高平의 역사 지리적인 특성 및 北朝시대 山西지방의 교통로의 검토를 통해, 羊頭山石窟이 위치한 高平이 北魏 시기에 발달한 大同과 洛陽을 연결하는 山西의 남북 간선로상의 주요 요충지였던 점에서, 北魏 太和年間 이래로 北齊 시기의 新양식을 수용하기보다는 北魏 양식을 고수하는 한편 炎帝 神農氏와 같은 지역 특유의 토속적인 민간문화와 결부되면서, ‘고평인근 특유의 지방 양식’으로 발전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羊頭山 북조석굴에서 확인되는 이러한 지방색은 석굴 내에 남아있는 공양자가 황제나 귀족이 아니라 고평 인근에서 활동한 민간의 신도단체였다는 점에서도 재차 확인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羊頭山石窟을 통해 북위가 太和18年에 단행한 洛陽遷都라는 역사적인 사건과, 북위불상의 漢化가 이루어지는 현상을, 산서의 교통로를 매개체로 하여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본 석굴의 의의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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