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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성운 (목포대학교)
저널정보
역사문화학회 지방사와 지방문화 지방사와 지방문화 제23권 제1호
발행연도
2020.5
수록면
79 - 119 (41page)
DOI
10.17068/lhc.2020.05.23.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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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는 1897년 개항이후 항구도시로 성장하면서 상공업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하였다. 다양한 산업시설들이 생겨났고, 특히 1904년부터 시작된 목포 고하도의 육지면 재배는 그와 관련한 공장들이 대거 형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렇듯 많은 공장들이 세워지면서 목포에는 일자리를 찾아 유입되는 인구가 크게 증가하였다. 대부분 서남해 인근지역의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이들은 자연스럽게 노동자층을 형성했다. 1920년대에 이르러 사회주의 성향의 젊은 운동가들이 생겨났고, 이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전위동맹이 설립되면서 노동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한편 1920년 공장이 완공된 조선제유주식회사는 최대 면실유 제조회사로서 목포의 주요한 사업을 이루었다. 그러나 회사의 규모와는 다르게 제유회사에서 일하던 한국인 노동자들은 낮은 임금과 민족적 차별을 받으며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있었다.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가던 한국인 노동자들은 조선제유주식회사의 민족적 차별을 해소하고, 임금을 인상시키기 위해 노동조합을 만들어 파업을 준비했다. 힘없는 노동자가 이겨내기에는 일본의 자본과 일제 경찰의 압박이 거대했다. 이는 노조원들을 불안하게 하여 단결력을 약화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파업 초기 노동조합은 지속적으로 결집하였고, 뛰어난 조직성을 보여주며 일제의 압박을 이겨냈다. 이는 1920년대 노동운동에서 보기 드문 투쟁으로, 노동운동의 질적 수준을 한단계 높여준 사건이었다. ‘결사대’라는 초보적인 조직부터 시작하여 점차 성장하여 ‘행상대’를 만들고, 인근지역의 사회단체와 연대를 이루었다. 또한 지속적인 활동을 통해 각지에서 동정과 후원을 받기도 했다. 이렇듯 제유노조는 적절한 전략을 구사하여 파업을 확대하고 지속하였다. 그러나 결국 회사 측의 회유와 교란, 그리고 경찰의 동원으로 인해 노조의 주요지도부가 체포되면서 투쟁의식이 약해졌고, 일부 노조원의 이탈로 인해 사기가 저하되면서 결국 노조의 해체로 귀결되었다.
1926년 발생한 제유노조파업은 약 3개월간의 파업기간 동안 노동자들의 높은 조직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다. 또한 엄동설한의 극심한 추위와 굶주림을 견디면서도 단결과 투쟁을 지속하는 강한 정신력을 보여주었다. 기존의 파업보다 강력했고, 더불어 지역민들에게도 식민권력과 자본에 대하여 경계심을 불러 일으켜주는 계기를 마련했다. 제유노조파업이 장기간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는 노동자들의 강인한 정신력, 이들을 이끌었던 전위동맹이라는 사회단체, 지역 시민들의 관심과 후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비록 파업의 목적을 성취하지 못했지만 뛰어난 단결력과 높은 정신력, 그리고 노동운동의 의식 성장, 민족해방운동의 성격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 사건은 훗날 이어진 국내 노동운동에도 큰 영향을 줄만큼 의미 있는 투쟁이었다.

목차

초록
1. 머리말
2. 1920년대 국내 노동운동 양상과 목포지역 사회상
3. 목포 제유노조파업의 전개과정
4. 목포 제유노조파업의 역사적 의의
5. 맺음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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