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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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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정보
저널정보
동학학회 동학학보 동학학보 제55호
발행연도
2020.1
수록면
79 - 110 (3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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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동학농민전쟁 연구는 민중 주도의 반봉건·반제국주의 변혁운동으로서 1919년 3.1운동으로까지 이어지는 ‘근대민족해방운동사의 선구’라는 운동사적 서사에 기반하고 있다. 이러한 서사는 1919년 3.1운동을 전후로 형성되었으며, 대중문화와 결합되어 확산될 수 있었다. 본 논문에서는 인식의 전환과 확산 과정을 살펴보고 그것이 갖는 의미와 함께 1919년 이후 민족운동 과정에서 동학농민전쟁이 차지하는 위치를 확인하고자 하였다. 우선 3.1운동 직후 동학농민전쟁에 대한 기억이 본격적으로 소환되어 재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3.1운동에서 보여준 민중적 역량에 대한 지식인들의 기대감 때문이었다. 또한 3.1운동 이후 천도교 청년회를 중심으로 한 천도교세력의 정치세력화 과정에서 이들은 동학농민전쟁을 적극적으로 소환하였다. 이를 위해 천도교청년회 기관지인 『개벽』은 동학농민전쟁에 대한 기억을 적극적으로 소환하였으며, 민족주의 세력 내 자신들의 정치적 위상과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동학농민전쟁은 민중운동으로서 재해석되었으며, 다양한 대중문화와 결합되어 확산될 수 있었다. 특히 1920년대 중반 이후 영웅의 출현을 고대하는 ‘待望論’이 확산되는 가운데 전봉준은 민중의 지도자로 부각될 수 있었다. 당시 출간 되었던 전봉준위인전은 이러한 대중적 인기를 기반으로 상업성을 띄고 있었으며, 당대 최고 스타였던 임선규는 연극 「동학당」을 공연하여 상당한 인기를 끌기도 했다. 하지만 이시기 형성된 동학농민전쟁 인식은 여전히 제한적이었으며, 1900년대 문명론적 인식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비록 민중운동으로서 평가되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동학에 의해서 개조(계몽)된 민중이 주도한 것이었으며, 전봉준이나 최시형과 같은 선각자의 지도에 의해 전개된 정치개혁운동이었다. 이러한 인식은 1900년대 문명개화론자들이 조선의 문명화를 위한 정치개혁운동의 일부로 동학농민전쟁을 포섭하고자 했던 논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들의 시야에서는 동학농민전쟁 당시 제기되었던 ‘斥倭倡義’는 여전히 벗어나 있었다. 오히려 ‘척왜’는 시대에 뒤쳐진 배외주의에 불과한 것으로, 민중의 정치의식 부재로 평가받았뿐 아니라 동학농민전쟁의 실패 원인으로 지적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의 한계는 오히려 동학농민전쟁을 매개로 민족운동 세력을 결집하고자 했던 천도교 세력들의 다양한 시도들이 좌절되는 한 요인으로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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