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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연세대학교 의학사연구소 연세의사학 연세의사학 제22권 제2호
발행연도
2019.1
수록면
151 - 168 (1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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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3・1운동 전후의 짧은 기간 동안 세브란스병원 내에서 3・1운동과 관련된 활동들을 살펴봄으로써 독립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던 3・1운동 시기 세브란스병원의 역할을 기관 중심으로 정리하였고 3・1운동을 겪으면서 세브란스병원이 받았을 영향과 그로 인한 변화를 기술하였다. 선교병원인 세브란스병원은 선교부로부터 정교분리의 원칙을 준수하라는 지침을 받아서 정치적 의견을 적극적으로 제시하지는 않았지만 일제의 시위진압과 잔혹성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시위 부상자와 고문 피해자를 치료하였고 일제의 만행을 해외로 알려 국제 여론 형성에 기여하였다. 부상자의 치료는 수술적 치료가 필요한 총상과 자상 환자가 대부분이었고 멀리 평안남도와 충청남도에서도 환자가 세브란스병원을 방문하였다. 전근대적이고 민족 차별적 형벌제도인 태형의 피해로 사망자가 발생하기도 했는데 피부이식술(pinch graft)로 치료하여 많은 생명을 구하기도 했다. 선교사들에게도 태형은 잔혹한 형별로 받아들여졌고 피해 자료를 모아 총독부에 태형 철회를 요구하여 1920년 4월 1일부터 조선태형령은 폐지되었다. 3・1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세브란스의전은 총독부로부터 의학전문학교로 인가를 받고 있었지만 총독부 지정학교로 인가받지는 못해서 의전을 졸업하더라도 의사시험을 통과해야만 의사면허를 취득할 수 있었다. 총독부 지정학교 인가를 위해 상근 일본인교수의 채용을 확대하고 있었고 일본어로 수업을 진행할 수 있게 준비하고 있었다. 3・1운동 전에는 총독부 지정학교가 되기 위해 총독부 통치에 순응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3・1운동을 겪으면서 총독부와 세브란스의전은 긴장관계로 바뀌었다. 이후 총독부의 유화정책으로 긴장관계는 해소되었지만 상근 일본인교수들의 사직과 F.W. Scholfield의 귀국으로 자격을 갖춘 교수진을 구성해야 하는 중요한 시기에 곤란한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자격을 갖춘 조선인 교수의 채용과 세브란스의전 졸업생의 연수를 통해 역량 있는 교수진을 구성하게 되는 전환점이 되었고 이전까지 시행되었던 상근 일본인교수 채용정책은 폐기되었고 일본인 비상근 시간강사가 일부 과목에 한정하여 강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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