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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저자정보
이계형 (국민대학교)
저널정보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국독립운동사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73집
발행연도
2021.2
수록면
171 - 207 (37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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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한국독립운동을 주도해 나간 것은 중국 관내의 독립운동세력이었다. 중일전쟁 이후 독립운동계는 ‘이당치국(以黨治國)’을 통한 독립운동 방략을 모색하였다. 신익희는 위유런(于右任)의 도움으로 난징의 국민당 정부에서 근무할 때, 1931년 9월 만주사변을 기회로 처음으로 한국혁명당을 창당하였다. 이 단체는 난경에서 활동하던 다양한 이념을 가진 인사들로 구성되었다. 신익희는 이를 기반으로 1932년 11월 여러 독립운동 단체와 함께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결성하고, 지청천이 이끄는 만주 한국독립당의 합당을 추진하여 신한독립당을 새롭게 출범시킨 뒤 교섭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그는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대표대회를 통해 ‘단일대동맹’을 결성하고자 하였지만, 각기 통합방식을 두고 힘겨루기하면서 그러한 구상은 지지부진하였다. 그런 가운데 1935년 7월 그는 신한독립당의 대표로서 의열단·한국독립당·신한독립당·조선혁명당·대한독립당 등을 하나로 묶어 민족혁명당을 결성하는데 힘을 보탰다. 그는 민족혁명당의 중앙집행위원으로서 당내의 의견 대립을 중재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하지만 민족혁명당은 상하이 한국독립당과의 당의·당강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였고 임시정부의 존폐 문제를 두고 합의점을 찾지 못하여 결국 일부 인사가 탈당하면서 위상은 예전만 못했다. 그런데도 신익희는 민족혁명당에 남아 김원봉과 함께 활동하면서 1937년 11월 공산주의와 무정부주의 계열 인사들과 함께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하였다. 이후 그는 1939년 8월 사천성기강에서 좌우익 세력을 통합하려는 ‘7당통일회의’에 참가하였다. 통일회의는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나 조직 방식을 두고 논쟁이 격렬해지자 신익희는 회의에서 퇴장하였고, 결국 통일전선운동은 결실을 얻지 못하였다.
신익희는 1930년대 한국독립운동계의 숙원이었던 정당의 통일전선운동에 누구 못지않게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었다. 아마 세 차례의 통합운동에 모두 참여한 것은 신익희가 유일하지 않을까 한다. 하지만 신익희는 이를 주도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통합전선운동이 당 대 당 결합이었기 때문에 그만큼의 자신의 세력을 가지고 있어야 했지만, 그는 그러지 못했다.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규모의 인원과 군사를 확보해야 했고 재정 또한 모자람이 없어야 했지만, 그는 이러한 요인들을 충족하지 못했다.

목차

1. 머리말
2. 한국혁명당 조직과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 결성
3. 민족혁명당 창당과 민족연합전선 형성
4. 좌익 성향의 조선민족전선연맹 결성과 조선청년전위동맹 성립
5. 7당통일회의와 전선통일운동
6.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요약
Abstract

참고문헌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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