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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규훈 (국립중앙박물관)
저널정보
국립중앙박물관 미술자료 미술자료 제94호
발행연도
2018.12
수록면
60 - 88 (29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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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대모산 남쪽에 자리잡은 헌릉은 조선 3대 국왕 太宗(재위 1400~1418)과 그의 비 元敬王后 閔氏(1365~1420)의 雙陵으로 조성되었다. 헌릉은 건원릉과 함께 유일하게 신도비각을 갖추고 있으며, 비각 안에는 15세기 세워졌던 舊碑와 17세기에 재건된 新碑가 나란히 서있다. 무엇보다도 『獻陵碑石重建廳儀軌』(이하 『헌릉비석의궤』)가 전하여 당시 상황 뿐 아니라 조선시대 비석이 어떤 과정으로 제작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헌릉 신도비의 중건이 중요한 까닭은 세조 이후 금지되었던 隆碑를 세운 것이다. 쉽게 결정될 문제는 아니었으나, 결국 훼손된 왕릉을 복구한다는 측면에서 일을 진행 시킬 수 있었다. 그 결과 조선 후기 들어 국가에서 직접 세운 최초의 사례가 되었다.
『헌릉비석의궤』를 통해 재건과정을 살펴보면, 먼저 석재의 산지를 정하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여기서는 강화, 충주, 강음 세 곳이 언급되었다. 강화의 돌은 무채색에 가까운 화강암으로서, 견고하고 단단해 왕릉과 사대부의 묘소에서 석물로 쓰이던 것이었다. 그러나 舊碑의 예를 좇아 무른 계열[軟石]의 돌을 사용하고자 하였고, 충주와 강음 두 산지 중 최종적으로 강음이 선택되었다. 이 같은 결정은 더 좋은 것을 선택하여 세우고자 한 데에서 비롯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건에 동원된 장인들은 모두 이전부터 國役에 참여한 이들이었다. 다양한 방면에서 참여한 장인들 가운데 石手, 冶匠, 刻手 등이 비석과 직접 관련된 일을 맡았다. 기록 중 석수 중 일부는 龍頭匠으로 분류되었는데, 이는 螭首를 제작한 석수가 따로 있었음을 알려준다. 글씨를 새긴 각수들은 하루에 10여자도 새기기 어려웠다. 또 어두운 돌 색으로 인하여 밀가루를 뿌려 글씨를 확인하며 작업하였다. 이들 외에도 비각의 중건과 관련된 木手, 蓋匠과, 비문을 印出하여 진상용 족자를 만드는 일과 관련되어 簇子匠, 豆錫匠도 참여하였다. 이들 외에도 비석을 나르는 데에는 수천의 인원이 동원되었다. 이처럼 헌릉 신도비의 재건에는 수많은 인력과 예산이 필요하였다.
약 200년의 시차를 두고 세워진 두 비석에서는 조선 초기와 후기의 비석 양식의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舊碑는 중국 비석의 양식으로 세워졌으며, 귀부의 경우에는 고려 탑비와 같은 전통적인 표현이 적용되었다. 新碑에서는는 독창적인 양식이 전개되었는데, 이수의 경우 17세기 양식을 기본으로 하면서 당시에는 나타나지 않던 舊碑의 표현을 부분적으로 따와 적용하였다. 그 결과 조선후기 비석들을 통틀어 유일하게 확인되는 篆額과 독창적인 이수 양식을 확인할 수 있다. 귀부의 경우는 15세기 정립되었던 조선 귀부 양식을 바탕으로, 17세기에 제작되기 시작한 龍頭形으로 조성하였다. 이수와 귀부에 각각 다른 양식을 적용한 것은 당시 사람들의 선택에 따른 것을 알 수 있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獻陵 神道碑의 建立과 再建
Ⅲ. 『헌릉비석의궤』를 통해 본 재건 과정
Ⅳ. 헌릉신도비의 양식적 특징
Ⅴ.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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