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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성강현 (동의대학교)
저널정보
동학학회 동학학보 동학학보 제56호
발행연도
2020.1
수록면
225 - 267 (43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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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옥천 지역의 동학 전파와 동학 조직의 확산을 살펴보는 데 있다. 연구 결과 충청도의 동학 유입은 최제우의 창도기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충청도의 동학 유입은 1874년 해월의 단양 이주로부터 본격화하였다. 해월은 단양을 거점으로 충청도와 전라도, 경기도까지 교세를 넓혀나갔다. 1883년을 시점으로 충청도의 도인들이 동학교단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기 시작하였다. 손병희·손천민·박인호·서인주·서병학·조재벽·임규호·권병덕 등이 당시 입도한 인재로 1892~3년의 4차에 걸친 교조신원운동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옥천의 동학 유입 시기는 임규호와 조재벽의 활동으로 보아 1886~1887년경으로 보인다. 옥천과 청산은 충청도의 다른 지역에 비해 비교적 늦은 시기에 동학이 전해졌지만 빠른 성장세를 보였다. 1890년대에 들어와서 옥천과 청산의 동학도들이 관의 수탈 대상이 될 정도로 교세가 급성장하였다. 옥천 동학의 중심인물은 박석규이고 청산의 중심인물을 박원칠이었다. 박석규와 박원칠은 1893년 2월의 광화문복합상소에서 봉소인으로 참여할 정도로 교단의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다. 박석규는 보은 교조신원운동에서는 옥의대접주로, 박원칠은 청의대접주로 활약하였다. 이들은 동학농민혁명 2차 기포에 동참하여 손병희 휘하에서 우금치, 청주, 청산, 보은 북실, 영동 용산시전투 등의 참전하였다. 동학농민혁명의 실패로 박석규는 청주병영에 체포되어 참형되었으나 박원칠의 행적은 드러나지 않는다. 옥천 지역의 동학 세력이 성장함에 따라 교주 최시형을 정점으로 대접주-수접주-접주의 조직을 갖추었다. 각 접에는 접사와 성찰이 있었고 포덕을 담당하는 포덕장과 육임의 직책을 맡은 도집과 집강 등이 있었다. 그리고 동학농민혁명 시기에 포군, 운량도총감, 선봉장, 군자금 담당 등 군사 활동과 관련한 직책이 늘어났음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옥천 지역의 동학 조직은 동학농민혁명 이전에는 종교적 조직이었지만 동학농민혁명 시기에는 급격히 전투조직으로 변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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