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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성훈 (부산박물관)
저널정보
온지학회 온지논총 온지논총 제65호
발행연도
2020.1
수록면
161 - 202 (4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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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소장 ≪七分傳神帖≫은 任希壽(1733∼1750)가 1749∼1750년에 그린 초상화 草本들로 꾸며진 초상화첩이다. 임희수의 부친 任瑋(1701∼1762)는 1754∼1760년의 어느 시점에 아들이 남긴 초상화들을 화첩으로 장황하고 부기를 작성해 그 화첩에 직접 썼다. 이 화첩에 수록된 초상화들은 총 19점이며 이 중 화첩 마지막에 실린 <강세황 초상> 및 대상 불명의 초상화 등 2점을 제외한 17점의 초상화가 임희수의 것으로 파악된다. ≪칠분전신첩≫ 수록 초상화들은 張志淵(1864∼1921)의 『진휘속고(震彙續攷)』에 실린 임희수에 대한 기록을 토대로 그가 喪中인 자신의 집을 방문한 당대의 명사들을 사생한 그림들로 알려졌다. 이 기록은 그의 초상화 제작과 그 대상 인물의 선정이 우연히 이루어졌던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러나 이 초상화의 주인공들은 모두 임위와 사승?혈연 관계로 얽힌 소북 남당 소속 인사들이었으며, 임희수는 이들의 초상화들을 평시에 제작했다. 이 사실은 임희수가 자발적으로 이 인사들을 그린 것이 아닌, 부친 임위의 적극적인 주문 혹은 권유를 받아 그들의 초상화를 제작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 화첩 초상화들의 제작은 조선 후기에 특정 붕당?학파의 인사들이 자신들이 추앙하는 선사의 초상화를 제작했던 관행 및 동류의 인물들이 함께 초상화를 남겼던 관행 안에서 이해될 수 있다. ≪칠분전신첩≫에는 그 얼굴 모습과 복식이 조금씩 다르게 표현된 임위의 초상화가 5점이나 실려 있다. 이는 임위가 임희수의 화재를 빌려 자신의 모습이 정확히 포착된 초상화를 남기고 싶어 했음을 입증한다. 또한 조선시대에 사대부들이 초상화를 제작한 목적이 대상 인물의 모습을 정확히 재현해 후대에 그의 모습을 남기는 데 있었던 점도 보여준다. 사대부들이 이처럼 자신들이 완벽히 재현된 초상화를 얻고자 했던 것은 초상화에 한 인물의 학문적 성취나 고매한 정신이 고스란히 반영되고 담겨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自誌類의 글처럼 초상화에도 어떤 기질이나 성격 그리고 신념이나 소신 등 그의 정신적인 면모가 반영될 수 있으며 후대의 사람들이 이를 알아차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임위는 그 초상화들을 이 화첩에 수록한 뒤에 자찬문 성격의 부기를 남겨 자신의 내면 의식을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과거 급제 후 줄곧 관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찬문 성격의 부기에서 은거와 출세의 삶 사이에서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는가 하면 훌륭한 문사 그리고 강직한 관리로서 평가되고 후대에 기억되기를 바랐다. ≪칠분전신첩≫은 18세에 요절한 한 젊은 문인 화가의 畵才를 입증하는 작품으로 이해되고 있지만, 오히려 이 화상첩은 조선 후기에 사대부들이 초상화를 제작한 실질적인 목적과 초상화란 매체를 활용한 방식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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