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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헌주 (국사편찬위원회)
저널정보
우리한문학회 漢文學報 漢文學報 제43권
발행연도
2020.1
수록면
71 - 106 (3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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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위는 동아시아 삼국이 내우외환으로 큰 혼란을 겪던 격동의 19세기를 불꽃처럼 살다간 선각적 지식인이자 당대 조선을 대표하는 詩人이었다. 그는 한미한 무반 가계 출신이라는 신분적 한계로 인해 종신토록 자신의 포부와 역량을 충분히 펼 수 있는 지위를 얻을 수 없었다. 하지만 뛰어난 식견으로 문호 개방을 전후한 시기 위정자들이 정책 결정을 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고, 한문학에서도 한말 사대가로 불릴 정도로 큰 족적을 남겼다. 본 논문에서는 1880년대에 강위가 감행한 두 차례의 일본 여행과 연이은 중국 상해 여행을 중심으로 그의 만년의 삶을 다루었다. 강위는 환갑이 되던 1880년 제2차 수신사 김홍집을 수행하여 첫 번째 일본 여행을 했고, 2년 후인 1882년 초 김옥균과 함께 두 번째 일본 여행에 나섰다. 제2차 수신사행에서 일행에게는 조일 양국의 외교적 현안의 해결과 이홍장이 보낸 밀함과 관련한 일본의 동정 파악과 개화 문물의 시찰이라는 명확한 소임이 있었다. 이 때문에 수신사 일행의 움직임은 외교 현안 해결에 집중되었고, 개화문물 시찰이나 일본 측 인사들과의 교유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반면 일본의 국정 탐색과 함께 국채 모집의 의도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1882년의 일본 여행에서는 상대적으로 기간과 세부 일정 등에서 여유가 있었다. 덕분에 메이지 일본이 추진하고 있는 근대화의 실상을 자세히 살피고 다양한 인사들과 교유할 수 있었다. 조선 정부는 제2차 수신사행이 귀국 때 『조선책략』을 가져오자, 이를 계기로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별다른 진척이 없었던 개화정책 추진을 가속화하였고, 청국 정부에도 영선사를 파견하여 미국과의 수교를 주선해줄 것을 요청하여 조미조약을 조인하였다. 하지만 『조선책략』의 반입으로 국내에는 거센 반개화 운동이 촉발되었는데, 강위는 유생들의 반대 논리를 반박하는 두 편의 글을 지어 개화정책 추진의 정당성을 옹호하였다. 이는 조선 정부의 대미수교․개화정책 추진의 논리와 명분을 제공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두 차례의 일본 여행을 통해서 강위는 일본의 근대화 추진 실태와 함께 흥아회가 주창하는 ‘아시아 연대론’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귀국하던 중 임오군란 소식을 듣고 어윤중과 사태 수습을 논의하기 위해 天津 방문을 계획했던 강위는 이후 양무운동의 산실인 상해의 근대문물을 살펴보고 귀국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였다. 이미 두 차례의 여행을 통해 일본의 근대화 추진 실태를 살펴보았으니 청국에서 추진하고 있는 양무운동의 성과도 직접 눈으로 보고 싶었던 것이다. 강위가 청일 양국의 근대화 정책 추진의 실태를 두루 살피고 귀국한 것은 1882년 11월의 일이다. 귀국 후 그가 어떤 활동을 했는지는 명확히 확인되지 않아 아쉬움이 크다. 이는 고령의 나이에 무리한 외유를 했던 후유증 때문이기도 있지만, 김옥균 등 개화당 인사들과 친밀했던 그의 이력으로 인해 갑신정변 실패 이후 기록의 대부분이 인멸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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