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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백광열 (한국학중앙연구원 비교문화연구소)
저널정보
한국사회사학회 사회와역사 사회와역사 제122호
발행연도
2019.1
수록면
7 - 50 (4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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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3·1운동기 근대적인 사회가 성립되어가는 상황 속에서 유림이 처한상황과 위상이 어떠했으며, 그들이 제시한 문명화의 길은 어떤 비전을 갖고 있었는가를, 3·1운동 및 파리장서사건에 대한 유림의 관련을 소재로 해서 살펴본 것이다. 종래 유림이 3·1운동기에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고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다는 통념과는 달리 최근에는 이 시기 유림의 활동에 대해 많은 관심이 주어지고있다. 특히, 지방 유지라는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던 유림세력은 서울에서의 독립선언 이후 지방에서 만세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데 많은 기여를 하였다. 그리고 파리장서운동으로 유림의 민족의식이 대외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 같은 운동의 성과에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가지고 존재하던 유림들의 존재형태가 미친 영향이 크다. 이 같은 네트워크형 조직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유림이 표방한 유교이념의 본원적 측면, 즉 효제를 근본원리로 한 인간 관계의 동심원적 확산이라는 원리가 반영된 것이다. 하지만, 점차로 법인적 단체에 의해 공적 영역이 주조되어가던 근대사회에서 이 같은 네트워크적 이념과 조직형태는 변화의 압력을 받고있었다. 실제로 유림 민족운동 중 다수는 유교 본연의 이념으로부터 일정정도 이탈한 ‘개신유림’에 의해 주도되었다. 유교인들의 법인적 단체도 등장하였다. 그러나유교 본연의 ‘내수적 처세’를 강조하는 유림도 여전히 존재했고 그것의 사상적 기여도 무시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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