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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윤인현 (인하대학교)
저널정보
국제비교한국학회 비교한국학 비교한국학 Comparative Korean Studies 제27권 제2호
발행연도
2019.1
수록면
15 - 59 (45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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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시대 초나라 충신 굴원은 역대로 중국과 한국에서 문인과 유학자들에 의해대체적으로 높이 평가되었지만, 경우에 따라서 폄하되기도 하다. 본고는 그 배경과 이유를 살피면서 두 나라의 문인에 의해 소환된 굴원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고찰한 것이다. 이는 굴원을 알기 위한 한 방법이었다. 한나라와 송나라 때의 굴원상은 충절과 청렴함으로 일월처럼 빛났다. 다만 後漢 의 반고는 굴원의 투신에 의문점을 표했다. 당․송 시대 유배객들은 자신들의 심정을 투하여 굴원을 소환하다. 이들은 굴원처럼 충언을 고하다 억울한 일을 당했다는 공통점을 보다. 중국 근대 변혁기의 굴원 소환은 불의에 항거하는 투쟁가 굴원이었다. 외세에 의해 민족적으로나 사상적으로 흔들렸던 근대의 중국은 충절로 뭉친 불굴의 의지를 지닌 굴원이 필요했다. 한국의 신라시대 굴원은 충절가다. 하지만 당나라에서 벼슬하던 최치원은, 굴원이 현실 타협적인 어보(漁父)의 삶에 초점이 맞춰 있어, 타국의 고단함을 읽히게 하다. 또한 고려 무신정권 시대를 살았던 이규보는, 굴원이 죽음으로써 군왕의 악만을 드러내는 꼴이 되었다고 혹평하다. 하지만 고려 말기 충신 정몽주는 굴원의 외교적 능력을 높이 샀다. 원나라와 명나라 교체기의 고려는 풍전등화의 길을 걷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전기 굴원상은 훈구세력과 사림파에 의해 차이를 드러냈다. 훈구세력은 현실 지향적인 태도로 자신의 삶에 안주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면서 굴원의 마지막 행적인 추방된 삶을 따르고 싶지 않다는 뜻을 보다. 이에 반해 사림파는 굴원의 충절을 본받으면서 굴원처럼 추방되어도 자신의 신념을 버리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다. 생육신들도 굴원의 충절을 예찬하면서 자신의 본심을 드러낼 수 없는 상태에서는 굴원이라는 문학적 소재를 빌려와 우국충절의 뜻을 표현하다. 사화기(士禍期)의 일부유학자는 굴원의 지조보다는 세상인심에 따라 처신할 것을 은연 중에 비치기도 하다. 조선후기는 실학자들 중 유배와 관련된 인물들이 굴원을 소환하는데, 대체로우국충절의 소유자로 예찬하면서 숭모의 대상으로 삼은 점이 사림파와 비슷하다. 다만 정약용은 道가 서지 않은 시대에 출사한 굴원이 비극을 자초하다고 평하다. 구한말 독립운동가 최익현은 굴원처럼 혼자 죽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하으며, 황현은 굴원에 자신의 모습을 투하으며, 행동화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한탄한결과 자결로 이어졌다. 이는 굴원의 변함없는 우국충절을 계승하면서 조선 유학자의선비정신을 드러낸 경우이다. 나라가 망함에 대한 선비로서의 책임감에 통감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중국과 한국의 굴원상은 문인과 유학자들이 처한 역사적 환경과 처지에따라 그들이 소환하고 변용한 의미는 조금씩 차이가 났다. 하지만 중국인과 한국인에 의해 흠모되고 있는 굴원상의 핵심은 충절가 굴원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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