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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박경 (한성대학교 역사문화학부)
저널정보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한국민족운동사연구 한국민족운동사연구 제98호
발행연도
2019.1
수록면
89 - 120 (3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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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남도 강서군 사천 3.1운동 박 경 1919년 3월 4일 평안남도 강서군 사천시장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3월 1일 평양 만세시위에 참여했던 반석교회의 조진탁 장로가 독립선언문을 가지고 오면서 이곳에서도 만세운동이 계획되었다. 다른 지역의 만세운동과 마찬가지로 독립선언식을 하고, 만세를 부르는 평화적인 만세시위를 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평화적 만세시위에 일본 헌병들은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3월 1일 평양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이 사천까지 영향을 미치자 전국적으로 확산될 것을 막으려 한 것이었다. 일제의 총격으로 인해 다수의 참가자들이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었다. 자신의 가족, 친구, 이웃들이 총탄에 쓰러져가는 것을 본 만세시위자들은 일본 헌병 한 명과 헌병보조원 세 명을 응징하였다. 만세시위 다음 날 일제는 수 백 명의 사천주민들을 검거하였고, 그 중에서도 남성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구속시켰다. 일제는 사천지역 교회지도자들이 이 지역의 3.1운동을 주도하고 헌병들을 살해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판단하고 이들에게 사형, 무기징역 등의 높은 형벌을 내렸다. 또 만세시위 이후 도주한 자들은 끝까지 추적하여 엄벌함으로써 다시는 일제에 도전하지 못하도록 본보기를 보여주려 하였다. 사천 3.1운동의 주도세력들은 사천지역에 소재한 반석교회, 사천교회, 원장교회의 장로들이었으며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고, 연령대는 40대 이상이 많았다. 이를 통해 볼 때 사천 3ㆍ1운동은 교회의 지도자들 중심으로 계획ㆍ실행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일찍부터 있어오던 일제의 평안도지역 기독교 탄압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또한 사천지역이 쌀과 석탄이 많이 생산되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일제의 보급창고 역할을 했을 것으로 생각되며 이로 인해 일제가 다른 지역보다 이 지역에 대한 간섭과 탄압이 심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더욱이 평안도에는 다른 지역에 비해 많은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사천지역에서는 다른 지역보다 이른 시기부터 격렬한 투쟁이 일어났다고 볼 수 있겠다. 사천주민들은 3.1운동 이후에도 꾸준히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 1920년에는 대한국민회의 지회를 조직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하는 활동을 벌였고, 1921년에 들어서는 만주의 무장투쟁단체와 연계하여 사천대한독립청년단과 반석대한애국부인청년단을 조직해 더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더욱이 이 단체에 소속된 인물들은 사천 3ㆍ1운동을 주도했던 인물들의 자녀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즉, 사천주민들의 일제에 대한 분노와 독립에 대한 열망은 3.1운동 당시에만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었으며, 이들은 3.1운동을 계기로 꾸준히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노력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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