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한명기 (명지대학교)
저널정보
전북사학회 전북사학 전북사학 제59호
발행연도
2020.1
수록면
159 - 198 (40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1596년 명에서 礦稅의 폐단이 시작되었다. 광세란 광산 개발에 부과하는 세금이고 상세는 영업세와 유통세를 가리킨다, 당시 명은 萬曆三大征을 치르는데 필요한 戰費, 자금성의 화재를 복구하는데 필요한 비용, 황태자 혼례 비용 등으로 막대한 금액을 소모하여 재정이 고갈될 위기를 맞았다. 神宗은 각지에 환관을 보내 광세를 징수하게 했는데, 징수 과정에서는 수탈과 폭행, 횡령 등이 만연했다. 이것이 바로 광세의 폐인데 그것을 계기로 明末 사회는 도탄에 빠졌고 곳곳에서 民變이 발생했다. 高淮는 1599년 요동에 礦稅使로 파견된 환관이다. 그의 수탈과 악행 때문에 요동은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 그런데 고회의 수탈은 조선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는 부하들을 조선에 보내 인삼, 화문석 등 각종 토산물들을 징색했다. 고회는 조선에서의 징색을 당연하게 여겼는데 그 배경에는 명이 왜란 당시 망해가던 조선을 구해 주었다는 施惠者意識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한편 임진왜란 이후 수많은 명군과 상인들이 조선을 자유롭게 왕래하면서 조선 사정을 잘 알게 된 것도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조선은 고회의 광세 징수를 막으려고 했지만 명의 ‘은혜’를 무시할 수도 없었다. 결국 전쟁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조선은 고회의 징색 때문에 큰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고회는 1602년 조선을 압박하여 中江開市를 존속시켰다. 그것은 임진왜란 초 조선이 명으로부터 군량 등을 수입하기 위해 임시로 개설된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양국의 모리배들이 몰려들고, 분쟁이 발생하는 등 문제점이 생기자 조선이 폐쇄하려 했다. 고회는 조선 정부를 압박하여 시장을 존속시키고 상인들에게 영업세를 징수했다. 고회는 은을 챙기기 위해 중강개시를 존속시키도록 강요했던 것이다. 고회가 조선에서 각종 물자를 징색하고 중강개시를 존속시켜 징세한 것은 광세지폐가 변형된 형태로 재현된 것이었다. 더욱이 선조 말년 이래 조선에 왔던 명 칙사들은 엄청난 액수의 은을 수탈했다. 칙사들의 수탈에 고회의 징색이 더해지면서 조선은 심각한 피해를 보았다. 그 때문에 당시 조선 경제 회복을 위해 절실했던 은광 개발 등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요컨대 광세지폐는 요동을 피폐하게 하고, 광해군대 조선이 ‘반명감정’을 품게 되는 토양을 제공함으로써 누르하치가 굴기하는데 일조했다고도 할 수 있겠다.

목차

등록된 정보가 없습니다.

참고문헌 (0)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