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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역사문화연구 역사문화연구 제59호
발행연도
2016.1
수록면
37 - 76 (4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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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1922년 전라북도 익산군에 설립된 이리농림학교를 대상으로 학교의 설립과정과 지원자, 입학생, 졸업생에 착목하여 이리농립학교와 지역사회와의 관계성을 분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리농림학교 설립에 대해서는 이리를 중심으로 익산군에 거주하는(혹은 농장을 소유하는) 일본인 대지주뿐 아니라, 도내 평야지대에 거주하는(혹은 농장을 소유하는) 일본인 대지주들이 깊이 관심을 두었다. 그들은 경제력(기부)과 정치력(청원)을 구사하면서 이리에서의 유치를 실현하였다. 설립 후에는 이리농림학교는 조선 전 지역에서 수많은 조선인 지원자를 모았기 때문에 조선인 지원자에게 ‘좁은 문’이었다. 조선인 지원자들은 주로 관공서에 취직하고자 했고, 학업이 우수한 조선인 졸업생의 대부분은 출신 도에 돌아가서 관공서에 취직하였다. 그 ‘실적’이 각각의 출신지에서 조선인 지원자를 다시 이끄는 효과로 기능했다. 그리고 그 ‘실적’은 이리농림학교의 평가를 높였고, 그 결과 이리농림학교는 이리를 알리는 ‘유리한 선전기관’이 되었다. 조선인에 대한 차별적이고 식민지적인 행정기구와 경제기구의 밑에서는 중등교육기관을 졸업한 조선인의 취업기회는 한정되었다. 그럼에도 행정기관에서 하급행정직이나 기술직으로 취직하는 것을 목표로 많은 조선인 학생이 농업학교에의 진학을 희망하였다. 이러한 식민지 지배 하에서의 차별구조를 기점으로 하여 이리농림학교를 유치한 일본인 대지주들은 이것을 스스로 ‘유리한 선전기관’으로 활용한 것이다. 조선인에 비하여 일본인 입학자는 전북출신의 비율이 높았다. 일본인 졸업생들은 도외의 관공서, 민간기업 혹은 농장 등에 취직하였다. 단, 자택영업자 중에서는 전북 출신자 비율이 높았다. 전북에 거주하는 일본인 농가와 농장 경영자에게는 이리농림학교는 자신의 후계자의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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