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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강종원 (한밭대학교)
저널정보
백제학회 백제학보 백제학보 제26호
발행연도
2018.1
수록면
155 - 182 (2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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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무왕대 조영된 것으로 비정되는 주요 건축물의 현황과 관련기록, 당시의 정국변화 등을 통해 대규모 건축물의 조영과 정치적 변동 관계를 검토한 것이다. 무왕대 조영된 것으로 확인되는 중요 건축물로는 익산지역에 왕궁성, 제석사, 미륵사, 그리고 부여지역에 중수된 궁궐, 왕흥사와 궁남지가 확인된다. 왕궁성의 조영은 인장와, 출토유물, 〈觀世音應驗記〉의 내용 등으로 볼 때 무왕대 이루어졌으며, 그 조영 시점은 무왕 3년 신라와의 전쟁에서 대패한 이후로 추정된다. 제석사도 왕궁성이 조영되는 시점에서 함께 조영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조영 주체는 무왕이었다. 미륵사는 『三國遺事』의 미륵사 창건내용과 〈舍利奉安記〉, 그리고 유적의 조성과정과 출토유물을 통해 조영 시기를 두 단계로 이해할 수 있었다. 무왕 31년 사비 환궁이후에 조영된 왕흥사는 위덕왕대 초창되고 법왕에 의해 중영되었지만 무왕에 의해 완성되었으며, 바로 이어서 궁남지가 조영되었다. 이들 건축물의 조영 주체는 왕궁리유적과 제석사, 사비 환궁 이후에 조영된 왕흥사와 궁남지의 경우 무왕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미륵사의 경우에는 조영 주체가 복수로 확인된다. 초창은 선화왕비의 발원으로 이루어졌으며, 조영과정에서 익산지역 불교세력과 재지세력의 지원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서원은〈舍利奉安記〉를 통해 사탁왕후가 조영 주체였음을 알 수 있으며, 사씨세력의 지원이 있었을 것으로 파악된다. 다음은 건축물의 조영과정을 통해 당시 정국의 변화상을 파악하였다. 무왕이 익산지역에 왕궁성과 제석사등을 건립한 것은 익산경영을 통해 정치적 안정과 왕권 강화를 추진하기 위한 것으로 이는 익산지역이 그의지지기반이었기 때문이었다. 왕궁성은 무왕 사후 의자왕대 사찰로 전용되었는데, 익산 재지세력의 약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 동안 무왕말기 사비지역에서의 대규모 토목사업은 무왕의 왕권강화라는 측면에서 이해되었다. 그렇지만 왕흥사는 위덕왕이 ‘亡王子’를 위해 창건한 원찰로 법왕을 거쳐 무왕에 의해 완성되었는데, 그 배경은 무왕이 ‘亡王子’의 적통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정된다. 즉 ‘亡王子’에 대한 추모적 성격이 강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궁남지의 조성도 당시 무왕의 행위를 고려할 때 무왕의 왕권강화라는 정치적 목적으로는 적절하지 않다. 오히려 무왕 말기에 왕권강화가 이루어졌다기 보다는 현실정치에서 소외되었던 정국변화를 반영하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무왕대 조영된 건축물 가운데 정치세력의 변동양상을 잘 보여주는 것은 미륵사이다. 미륵사의 초창을 담당했던 것은 선화공주로 상징되는 왕비를 중심으로 한 익산지역의 세력이었으며, 서원은 무왕 40년에 사탁왕후에 의해 중창되었다. 이는 미륵사의 조영 주체에 변화가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며, 무왕 후반기 정치세력의 변동과 관련이 있다. 즉, 중앙 정치권력이 익산세력에서 사씨세력으로 옮겨간 정국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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