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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백제연구 백제연구 제61호
발행연도
2015.1
수록면
69 - 105 (37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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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지역에서 출토된 백제 사비기 유물 중에는 600년 무왕 즉위 이전으로 편년할 수 있는 자료들이 섞여 있다. 본고는 백제 중앙에서 익산 개발에 착수한 시기를 분석하고, 그 배경이 무엇인지를 밝히고자 했다. Ⅱ장에서는 무왕 부부의 무덤으로 알려진 익산 쌍릉에 대해 고분 구조의 변천과 더불어 木棺을 꾸미는 금동제장식품을 분석했다. 그 결과 능산리형 석실 중 중상총과 능산리 7호분은 6세기말에서 7세기초로 편년되지만 익산 쌍릉은 그 보다 늦은 것으로 보았다. 또 쌍릉 중에서 소왕묘가 먼저 만들어지고 대왕묘가 나중에 축조된 것을 확인했다. 이것은 쌍릉이 641년과 642년에 죽은 무왕 부부의 무덤은 아니라는 것을 알려준다. 대왕묘 출토품의 경우 미륵사지 사리기 보다 늦게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되어 이곳이 무왕릉일 가능성이 높다. Ⅲ장에서는 익산 왕궁리유적과 미륵사지, 제석사지 등 익산 지역 주요 건물지의 초축 상한을 검토했다. 익산 왕궁리유적 출토 와당은 6세기말부터 기와 건물의 축조가 시작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미륵사지에서는 6세기말에서 7세기초까지 소급되는 기와가 소수 출토되는데 이는“아버지가 터를 닦고 아들이 건물을 완성하였다”는 기록과 관련될 가능성이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소왕묘가 혜왕릉이나 법왕릉일 가능성이 없지 않지만 출토유물이 6세기말 보다는 7세기 전엽에 속하기 때문에 그 주인공은 무왕보다 먼저 죽은 또 다른 왕비인 선화공주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Ⅳ장에서는 6세기말부터 익산 지역이 집중적으로 개발된 배경으로 교통의 요지이자 관문 항구로서의 역할을 강조했다. 백제는 554년 성왕의 전사와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 562년 대가야의 멸망과 그에 따른 섬진강 루트의 단절로 인해 금강 하류역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었다. 금강변의 웅포나 성당포에는 신라의 울산항이나 일본의 難波와 마찬가지로 백제의 관문 항구이자 물류거점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익산 왕궁리유적 공방에서 생산된 고가의 물품들은 이러한 항만 시설을 통해 유통되었고, 대규모 사원과 왕궁 시설은 그것을 지원하고 국가적인 의례가 이루어지는 중요한 장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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