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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부산광역시 시사편찬위원회 항도부산 항도부산 제31호
발행연도
2015.1
수록면
299 - 337 (39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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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목적은 기장별신굿 중 가장 규모가 큰 대변별신굿을 그 연구대상으로 일제강점기부터 새마을운동을 거쳐 현재까지의 다변성을 내포한 대변이라는 장소에서 별신굿의 제의 공간·전승주체·제의에 있어서의 변화양상을 고찰하는 것이다. 연구방법으로는 기존의 선행연구를 바탕으로, 전승주체의 경험의 다양성을 파악하기 위해 시기별 별신굿을 경험한 주민 인터뷰를 실시하였으며, 제의 공간 및 제의의 변화양상을 파악하기 위해 2013년 7일간의 대변별신굿을 참여 관찰하였다. 연구결과를 정리해보면, 첫째 일제강점기의 대변별신굿은 지소에 신고를 하면 일제의 별 제재 없이 연행할 수 있었으며, 3년에 한 번씩 마을에서 제비추렴을 하여 이장단의 주최로 제를 올렸다. 제관선정은 무당이나 마을 인근의 점바치(점쟁이)가 대를 잡아 선정했다. 이렇게 선정된 제주는 별신굿을 지내기 전에 굿장문이라는 치성을 드리고 굿이 끝날 때까지 아무리 추워도 냇가에서 목욕재계를 했다. 그 당시 대변의 마을제당은 대변에 두 곳(현재의 할매당, 주사당), 무양리에 한 곳(무양당산), 연화리에 한 곳(현재의 할배당)이 있었다. 둘째, 해방 후 새마을운동기에 대변별신굿은‘미신’이라는 시대적 풍조에 의해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 단절되었지만, 별신굿에 비해 적은 경비로 마을수호신을 제사지내는 1월제만·6월제만·10월제만을 지냈다. 즉, 반농반어로 생계를 이어가는 대변주민들은 마을굿이 ‘미신’이라고 생각했지만, 농사와 관련된 산신이나 조업과 관련된 용신에 대한 신앙심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으며, 이는 1976년의 산신당과 1982년 용신당의 건립으로 이어졌다. 특히 1970년대 이후 별신굿의 재원인 어업 자원에 대한 소유권이 어촌계로 넘어가면서 별신굿에서 풍어제의 성격이 강화되고 풍농과 관련된 사설과 축원이 감소되고 산신이 풍어신적 성격으로 변화는 양상을 나타내었다. 마지막으로 1980년대 이후 대변별신굿은 연이은 인명사고로 별신에 대한 신앙심에서 별신굿이 재개되었으며, 동해안별신굿이 1985년 2월 1일에 중요무형문화재 제82호로 지정되어 1996년부터 기장군에서 문화재지원금이 지급되자 그 지원금이 나오는 해에 맞추어 별신굿의 주기가 늘어났다. 반면 지원금이 나오지 않는 제만들은 소멸·축소되었으며, 근대화의 개발에 맞추어 마을제당들이 소실되어 가는 경향을 나타냈다. 그리고 금기에 대한 부담으로 마을제관을 꺼려하여 기존의 대를 잡아 선정하는 기준에서 마을회의에서 결정하는 것으로 바뀌었으며, 과학·의료·위생의 발달에 의해 세미제(우물제)와 여제(전염병 방지제)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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