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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현종민 (서강대학교)
저널정보
서강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서강인문논총 西江人文論叢 第62輯
발행연도
2021.12
수록면
137 - 168 (32page)
DOI
10.37981/hjhrisu.2021.12.6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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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고려 초기 正胤과 太子에 대하여 재검토한 글이다. 우선 중국 측 사료와 탑비를 이용하여 정윤의 용례에 대하여 분석하였다. 그 결과 太祖代 정윤은 嫡子 또는 正統의 의미를 가진 용어였음을 확인하였다. 태조가 장자 왕무를 정윤으로 책봉한 이유는 그에게 보다 확실한 정통성을 부여해주기 위함으로 보인다. 光宗이 적장자인 王伷를 정윤으로 책봉함으로써 정윤은 본래의 의미로 쓰였다. 그러나 景宗의 遺詔에서 王治를 정윤이라 칭하면서 그 의미가 왕위계승권자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 후 顯宗代에 이르러 정윤은 사라졌다.
기록에 따르면 고려 초기 태자는 정윤을 제외하고 16명이다. 이들은 왕위계승과 무관한 왕자들로 선행연구에서는 일반왕자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보았다. 그러나 이 16명의 태자는 모두 죽은 후에 시호를 추증받았다. 그 시기는 경종~현종대로 보인다. 경종은 광종대 참소에 의해 투옥된 억울한 이들을 풀어주면서 정국의 안정을 도모했는데, 그 정책 중 하나로 일부 종실들을 태자로 추증하였다. 그리고 成宗은 경종대 화를 입은 종실들과 자신의 외척과 밀접한 관련 있는 종실들을 태자로 추증하였다. 마지막으로 현종은 康兆의 정변과 거란의 침입으로 인해 실추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정책 중 하나로 종실들을 태자로 추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고려 초기 태자는 당대 혼란했던 정국의 현실을 반영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고려 초기 왕들은 정국을 수습하고, 자신의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태자 추증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正胤의 용례 검토
3. 太子 追贈 기준과 그 정치적 의미
4.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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