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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공미희 (부경대학교)
저널정보
한국아시아학회 아시아연구 아시아연구 제25권 제1호
발행연도
2022.2
수록면
447 - 466 (20page)
DOI
10.21740/jas.2022.02.25.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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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한국전쟁 발발 후 부산으로 피란민들이 가장 먼저 유입된 시점부터 어떻게 해서 부산에서 정착을 해나갔는지에 대한 과정을 정부정책과 연관 지어 고찰한 것이다. 특히 피란민의 부산집중 및 수용 공간과 피란민의 구호와 수용양상을 정부정책과 실태로 분류해서 분석했고, 피란민들의 부산유입 방법에 대한 사례로서는 피란민 구술조사를 통해서 당시의 실태를 객관적이면서도 실증적으로 분석했다.
부산은 약 천일 동안 대한민국 정부의 피란수도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었고, 정부는 전쟁직후 「避難民 分散에 關한 件」과 「피난민 소개 및 구호요강 송부의 건」이라는 정책을 공포했으며 또 부산이 안정지역으로 지정되어 이에 피란민들이 부산으로 쇄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부산으로 몰려든 피란민들에게 정부는 1950년 8월 4일 「피난민수용에 관한 임시조치법」과 개정을 공포해 비상사태를 감안하여 임시로 피란민 수용구호를 추진하고 피란민 수용에 대한 공간적 범위를 귀속재산뿐만 아니라 그 이외의 주택, 여관, 요정 기타 건물에까지도 가능하도록 했다.
부산시도 피란민을 수용할 여유가 있는 가옥에 대해서 사회부 장관의 이름으로 입주명령서를 발부시켜 피란민을 수용하도록 하였고 또 마을 사람들에게 부탁을 해서 빈방 혹은 마을 방앗간이라도 거처를 마련해 주도록 했다. 그리고 식량배급 면에 대해서도 부산시는 처음 피란민이 올 때는 주먹밥을 만들어 주었으나 1주일이 지나면서부터는 1인당 하루 양곡 3홉과 부식비 50원씩의 식량배급을 지원했다. 그리고 그 이후 구호금으로 구성된 유엔 한국 재건단(UNKRA)은 전쟁 시기 원조자금을 관리하며 적극적인 활동을 통해 피란민과 무주택자를 구호했고 유엔민사원조사령부(UNCACK)는 구호물자를 피란민에게 공급하였다. 그러나 주택은 물론이고 식량배급도 부족하여 수용소에 있었던 피란민들은 그나마 끼니가 다소 해결되었으나 대부분의 피란민들은 스스로 판잣집이나 움막 등을 짓고 간신히 생계를 유지하면서 부산에 정착을 해 나갔다. 이처럼 피란민들의 부산 정착과정에는 어려운 점들도 많았고 피란민들에 대한 정부의 정책 또한 아쉬웠던 부분도 있다. 먼저 부산유입 제한조치를 실시했다는 점, 그리고 정부의 이런 통제 속에서도 자유롭게 유입한 피란민에 대해서 구호정책을 펴지 못했다는 점이다. 또 판자촌에서 화재가 발생했을 때 정부는 도시미관을 회복하고자 피란민들의 대체주거지를 확보해 놓지도 않은 채 판잣집 철거령을 내렸다는 것이다. 한편 이런 역경 속에서도 피란민들은 삶을 포기하지 않았고, 또한 원주민들 역시 자발적으로 피란민들을 위해 ‘방 하나 내어주기 운동’등으로 상호 협조하면서 회생하기 위해 노력했다. 따라서 이들의 손에 피땀 흘린 노력과 열정, 희생들이 오늘의 부산을 만든데 아주 중요한 일군으로서 한몫을 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목차

국문요약
Ⅰ. 들어가며
Ⅱ. 피란민의 부산집중과 수용 공간
Ⅲ. 피란민의 구호와 수용양상
Ⅳ. 나가며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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