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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도학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저널정보
고조선단군학회 고조선단군학 고조선단군학 제47호
발행연도
2022.4
수록면
305 - 340 (36page)
DOI
10.18706/jgds.2022.4.47.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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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2세기 말에 설치된 한사군 가운데 낙랑군과 현도군, 그리고 가장 늦게 설치된 대방군의 경우는 직간접으로 한국 역사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이들 3개 군이 지닌 상징성이 지대하였기에 실제 통치 여부와는 상관없이 관할권을 부여받은 양하는, 의제적인 관작으로서의 의미가 작동했다. 낙랑군공이나 낙랑태수 그리고 낙랑군왕 등이 그러한 호칭이었다.
고구려는 초기 단계에 현도군에 예속된 바 있었지만 종국에는 현도군을 축출하고 요동 지역을 석권했다. 그런데 당에서 사망한 고구려인들의 묘지명에 따르면 고구려를 현도로 일컬었다. 신라 말 선사들의 비문에 따르면 현도는 고구려와 고려를 가리키는 범칭이자 봉작으로 사용되었다. 현도는 ‘우리나라’를 가리키는 범칭으로 사용된 것이다. 현도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조선조까지 내려왔었다.
그리고 백제 왕들의 작호에 붙는 대방군공이나 대방군왕은 대방군이 지닌 권한과 역할을 백제 왕에게 위임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리고 전라북도 남원을 가리키는 남대방을 비롯해 후대 역사에도 적용되었을 정도로 영향을 끼쳤다.
삼국 정립이 종언을 고한 이후에는 ‘四郡’이 우리나라를 가리키는 범칭으로 인식되었다. 四郡과 우리나라가 등가치가 된 것은, 당초부터 중국 황제권 질서에 한국 역사가 속했다는 의미였고, 또 그렇게 인식한 것이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삼국기의 한사군 인식
Ⅲ. 통일신라 말기의 한사군 인식
Ⅳ.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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