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하라 (전주대학교)
저널정보
한국한문학회 한국한문학연구 한국한문학연구 제86호
발행연도
2022.12
수록면
139 - 192 (54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본고에서는 18세기 후반의 서울에 거주한 金履中(1740~1787)의 생애와 가계를 추적해 조선후기 양반이 직면한 빈곤의 문제에 접근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김이중의 외사촌동생인 兪晩柱의 일기 欽英 의 기록을 기초 자료로 삼았다. 김이중은 조선후기 노론계의 유력한 명문으로 일컬어지는 안동김씨의 구성원으로 淸風溪 주인 金尙容의 6대손이다. 서울에 세거하던 김상용의 직계 후손들은 병자호란을 겪으며 충청도 오두리와 덕산현 등지에서 새로운 생활의 기반을 찾았고, 김이중의 증조부인 金盛達의 대에 이르러 오두리에 정착하게 된다. 김성달의 5남 金時淨이 백부에게 입양되어 삶의 터전을 덕산현으로 옮긴 이래 김이중의 先代는 가난한 충청도 양반으로 몰락할 조짐을 보였다. 이후 김시정의 차남 金礪行이 32세로 사망하자 유가족인 그 아내 杞溪俞氏와 두 아들 김이중 및 金履弘은 생계를 이을 방법이 없었다. 이에 기계유씨의 친정에 의지하여 살아가기 위해 세 모자는 서울살이를 시작했다. 얼마 후 기계유씨가 사망하자 완전히 고아가 된 김이중 형제는 전적으로 외삼촌 俞漢雋에게 의지하게 되었고, 그들은 끝내 경제적으로 자립하지 못했다. 김이중은 龍仁李氏와 혼인하여 2남 3녀를 둔 가장이 되었고, 흠영 에 기록된 13년간 그의 가족은 서대문 밖 둥그재와 용산 확교동, 남대문 밖 도저동 등지에 거주했다. 이 가족의 주거지가 늘 도성 밖에 있었다는 점은 그들의 열악한 사회경제적 처지를 보여준다. 또한 이 가족의 빈곤은 잦은 질병과도 관련을 갖는데, 김이중의 자녀 중 2명은 1786년 서울에 유행한 홍역을 앓았으며, 1명은 그 시기에 사망했다. 또한 김이중은 질병에 시달리다 40대 후반에 사망했다. 김이중을 포함한 가난한 양반의 삶을 지켜본 유만주는 조선의 양반에게 가난이란 사형선고나 마찬가지라는 결론을 내렸다. 김이중 사후 15년 된 1801년 그 장남 金伯淳이 천주교도로서 처형된 것은, 부친으로부터 계승된 가난의 경로를 따른 귀결이 아닌가 한다.

목차

등록된 정보가 없습니다.

참고문헌 (0)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