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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박용국 (경상국립대학교 경남문화연구원)
저널정보
동방한문학회 동방한문학 동방한문학 제92호
발행연도
2022.9
수록면
279 - 322 (4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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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練藜室記述 을 비롯한 李叔蕃에 관한 기록과 그 어머니 관련 설화에 적지 않은 오류가 있음을 밝혔다. 고려 말기 이숙번의 증조부 李禧는 벼슬살이에 나아가 가계의 정치?사회적 입지를 다져 安城李氏 吏部侍?公派의 派祖가 되었다. 조선 초기 이숙번이 벼슬로서 크게 현달함으로써 안성이씨 이부시랑공파 가문이 정치?사회적으로 크게 성장하였다. 이숙번의 처부 청주정씨 鄭摠(1358~1397)의 집안은 여말선초 대표적인 사대부 가문이었으며, 이숙번의 손아래 동서 金五門과 柳佐도 조선 초기 대표적인 공신 가문 출신이다. 이러한 이숙번의 처부 가문의 정치?사회적 입지는 이숙번의 벼슬살이에서 매우 우호적인 정치적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이숙번은 청주정씨 사이에 한 명의 아들과 두 명의 딸을 두었다. 1416년 4월을 기점으로 권력의 중심에 있던 親功臣이 조정에서 차츰 사라졌으며, 이 무렵 안성부원군 이숙번은 숙청되었다. 그의 숙청은 다른 사례와 달랐다. 이는 태종이나 세종 모두 이숙번이 불충을 저지른 것으로 보지 않았던 것과 관련이 크다. 그러므로 이숙번은 일반적인 유배와 달리 함양 別墅에 自願 安置되었다. 그는 함양에서 寓居하는 삶과 크게 다르지 않은 추방 생활을 했던 셈이다. 그의 별서는 지금의 함양군 유림면 국계리에 위치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함양 거주 영양남씨의 실체를 고증한 결과 이숙번과 尹子當은 異父 형제가 아니라 姨從 사촌 형제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숙번과 윤자당의 이부 형제 설화는 李叔蕃의 어머니 영양남씨와 윤자당의 어머니 영양남씨가 자매지간이라는 사실을 착오한 것에서 비롯되었으며, 또 이숙번 가문의 세력 약화와 윤자당의 奉祀孫 단절 등을 배경으로 해서 생겨난 허구적 설화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이숙번의 경제력은 1416년 6월 연안부에 안치되었을 때도 온전했다. 이숙번은 비록 삭탈관직 되고 공신녹권을 회수 당했지만 그의 家産은 籍沒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함양에서 이숙번의 생활 형편은 풍족한 정도가 아니라 사치스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숙번 집안은 이후 경제적으로 서서히 쇠락해져 그의 사후 부인 정씨와 아들 및 첫째 딸도 궁핍해졌다. 다만 둘째 사위 강순덕은 분재 받은 재산을 잘 간수하였다. 정씨는 후사 없이 죽은 딸이 1415년에 분재 받았던 전장과 노비를 사위 강순덕으로부터 돌려받아 경제적 궁핍에서 벗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1438년 9월 25일 세종은 이숙번을 잘 살피고 보호해서 한성으로 데리고 오라고 知印 金稷孫에게 敎旨를 내렸다. 세종은 이숙번이 獻陵의 비문 내용에서 1398년 기사의 문구를 자세히 고증할 인물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이숙번은 함양으로 방출된 지 21년여 만에 한성을 향해 길을 나섰다. 이숙번은 1438년 10월 15일을 전후하여 함양을 떠나는데, 이날 오랜 친구와 沙斤驛 郵亭에서 만나 이별의 정을 나누는 시를 남겼다. 12월 12일 한성에 도착한 이숙번은 세종으로부터 후대를 받았으며, 한 달여 만인 1439년 1월 13일에 從便되어 경기 安山에 거주하다가 1440년 3월 15일에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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