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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서영교 (중원대학교)
저널정보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영남학 영남학 제83호
발행연도
2022.12
수록면
197 - 226 (3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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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2년 한강 유역을 석권한 신라는 이후 방어를 염두에 두고 가늘고 긴 그 군사적 경계 지대를 건설하여 남북으로 조여 오는 麗濟의 공격으로부터 그곳을 끝까지 사수해냈다. 그 요인 가운데 하나로 필자는 한강 수로에 주목했다. 앞서 백제의 稅穀은 한강 유역의 수로를 통해 한성 倉庫에 집적되었고, 그것이 한성백제의 國富의 근원이기도 했다. 하지만 400년 광개토왕이 남진하여 상류인 國原(충주)지방을 차지하면서 백제의 수취 물량은 감소하였고, 475년 한성이 고구려의 공격에 결정타를 맞았다. 한강수로가 그 기능을 상실하자, 백제는 수도를 웅진으로 천도했다. 이후 백제와 신라를 하나로 묶어준 것은 고구려에 대한 공포였다. 481년부터 羅濟同盟軍은 고구려의 공격에 대항하였다. 551년 羅濟聯合軍이 한강 하류 방면으로 진군했다. 백제가 한강 하류의 6군을 차지하는데 신라가 병력을 보내 주었고, 그 목적을 달성했다. 승세를 타고 신라는 한강 상류의 10군을 차지하였다. 그해 진흥왕이 남북 교통의 요충이었던 國原에 들렀고, 553년 7월 신라는 백제가 포기한 한성에 무혈 입성했고, 한강 하류 지역을 차지하여 新州를 설치했다. 한강 중상류가 신라의 수중에 있는 한 백제가 하류를 지배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언제든지 신라군이 강을 따라 내려오면서 보급을 받으며 진군해올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백제가 한성까지 육로보급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백제가 우세한 군대를 한성지역에 장기간 집중시키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신라가 그곳을 끝까지 사수할 수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661년 고구려가 신라의 북한산성(아차산성)을 치기 이전에 선제공격한 곳은 여주의 述川城이었다. 그 작전은 남한강을 타고 내려오는 신라의 식량 수송에 장애를 주기 위해 감행되었다. 672년 정월 나당전쟁 와중이었다. 신라는 한산주에 둘레 4360보에 달하는 거대한 晝長城(남한산성)을 쌓았다. 근자에 성 내에는 대형 창고를 지어 많은 군량미와 병장기를 비축한 신라유적이 발굴되었다. 1625년(인조 3) 10월 한강 중상류의 여주, 이천, 충주(가흥창) 등에 비축된 식량이 한강 수로를 타고 옮겨져 남한산성의 창고를 채웠다. 순리적으로 볼 때 신라 晝長城 ‧ 二聖山城(한성) 창고도 그러했을 것이다. 남한강을 이용한 보급품 운송이 신라가 하류 지역을 사수할 수 있는 버팀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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