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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문광균 ((재)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저널정보
국립해양유산연구소 해양문화재 해양문화재 제16호
발행연도
2022.6
수록면
301 - 334 (3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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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산도는 충청도 서해안에 있는 도서로 면적이 넓고, 경작이 가능할 뿐 아니라 충청도 내륙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 오래전부터 군사요충지로 지목되어 온 섬이다. 또한 이곳은 전근대 국가경제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조운제도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지역이었다.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금강 일대에서 거둔 세곡은 선박을 통해 서울로 수송되었는데, 원산도는삼남의 조운선이 반드시 경유해야 하는 지점이었다. 그만큼 원산도는 전근대 해양사에서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섬이었다. 이 연구는 원산도의 중요성을 염두하고, 지리적 특성으로 말미암아 추진된 조선시대 대(對)원산도 정책을 구체적으로 분석하였다. 조선전기 진관체제의 도입으로 충청도 수군은 보령의 충청수영을 중심으로 정비되었다. 원산도는 중요한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조선초기부터 정부가 공도정책(空島政策)을 추친하고 있었으므로 별도의 군사진은 설치되지 못했다. 원산도 역사의 변곡점이 된 시기는 1669년(현종 10)이었다. 이 해 정부는 「안민창사목(安民 倉事目)」, 「조전사목(漕轉事目)」 등 조운제도와 관련된 법령을 연이어 반포하면서 조운 항로의핵심 거점을 원산도로 지목하고, 이곳에 충청수영의 우후(虞候)를 유방(留防)하도록 했다. 즉, 국가재정의 손실을 방지하기 위하여 충청수군의 핵심인 정4품의 관원을 이곳에 머무르게 했던것이다. 우후는 이곳에서 6개월간 유방하면서 조운선의 점검과 호송, 해양경계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원산도가 우후의 주둔지가 되면서 이곳은 점차 군사기지화되었다. 이로 인해 18세기원산도는 ‘원산진(元山鎭)’이라고도 불렸다. 원산도의 군사기지화가 도민(島民)에게 혜택만을 가져다 준 것은 아니었다. 우후가 원산도에 유방한 이후 도민은 정규적인 세금 외에도 착선역(捉船役), 구증역(鉤拯役), 증렬미(拯劣 米), 요망역(瞭望役) 등의 부역에 동원되어야 했다. 이로 인해 원산도의 중요 마을인 진촌(鎭村) 과 선촌(船村)을 중심으로 마을간의 갈등이 야기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홍주, 결성, 보령 등 인근 군현에서는 이들의 생계 기반인 어선을 강제로 잡아가두는[추착(推捉)] 불법도 서슴치 않았다. 도서민에 대한 천대와 괄시가 사회 저변에 깔려 있었던 셈이다. 조선정부는 국가에서 중요하게 인식하고 있는 원산도, 그리고 이곳에 거주하는 도민의 유리도산을 방지하고자 1854년(철종 5) 원산진(元山鎭)을 전격 설치하였다. 충청감사는 복잡다단한 원산도의 행정 및 부세체계를 단일화하고, 해양방어를 강화한다는 명분아래 종9품의 별장을파견하였다. 그러나 이 조처에 충청수사의 반발이 매우 심했다. 충청수사는 지속적으로 원산도의 환속을 요구하였고, 그 결과 1869년(고종 6) 원산도의 우후 유방제 복구, 1871년(고종 8) 충청수사가 관할하는 별장진의 복설 등의 성과를 거두었다. 원산진이 설치된 이후 이곳에는 35명의 원산별장이 파견되었고, 19세기 말까지 원산도는 조운선 점검지와 해양방어의 전초기지로써의 기능을 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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