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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경록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저널정보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민족문화연구 민족문화연구 제92호
발행연도
2021.8
수록면
243 - 273 (3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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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전쟁은 16세기말 동아시아 국제질서 및 한중일의 역사전개를 변동시킨 역사적 사건이다. 동아시아 국제전쟁으로 임진전쟁의 역사적 의미를 분석하기 위해 국왕 선조의 전쟁인식과 전쟁지도에 대한 연구는 필수적이다. 전대미문의 국제전쟁이었던 임진전쟁이 발발하자 선조는 전쟁에 대비했다고 인식하고, 초기에 전통적인 방식의 전쟁지도를 시행했다. 그러나 국왕에게 신속한 전황보고가 없고, 왜곡된 보고내용으로 선조의 전쟁지도는 제한되었다. 선조는 신립의 패전으로 소극적으로 전쟁을 인식하고 전쟁지도에 혼선을 보였다. 일본군 병력, 전쟁지도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없는 상황에서 선조는 도성사수론을 일방적으로 폐기하고 정치·군사적 위험이 많았던 파천을 결정했다. 파천은 조선이 개국이후 최대 국가위기였다. 선조와 신하들은 파천기록이 후대에 전해질 것을 우려했다. 그럼에도 선조와 신하들은 파천논의에서 갈등했다. 반대에 직면한 선조는 신하들이 요구한 세자책봉을 수용했다. 세자책봉은 중요한 정치행위로 신중하게 이루어져야 했다. 그러나 전쟁이란 위기상황에서 신속하게 결정되어 향후 정치갈등의 원인이 되었다. 선조는 한양에서 개성에 이르는 파천과정을 통해 국왕으로서 난처한 경험을 했다. 관원들은 도망하고, 백성들은 국왕에게 적대적인 자세를 취했다. 일본군의 추격은 급박하게 이루어졌다. 선조는 개성에 도착한 뒤 파천책임론에 직면했다. 파천의 최종책임자였던 선조는 책임론에 소극적이었다. 한강방어선, 임진강방어선이 무너지자 선조는 평양, 의주 등지로 파천하고 명군의 파병을 요구하였다. 이 과정에 세자의 분조를 구성하도록 하여 조선군에 대한 지휘를 포함한 전쟁지도의 혼선을 초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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