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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고준휘 (표충사 호국박물관)
저널정보
동악미술사학회 동악미술사학 동악미술사학 제17호
발행연도
2015.6
수록면
463 - 495 (33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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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2010~2011년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양산 용당리 가야진사유적 출토 도자제기의 현황과 그 성격을 파악해보고자 한 것이다. 가야진사는 조선시대에는 중사에 해당하는 국가제례가 봉행되었던 사당이다. 발굴조사 결과 2차에 걸친 조선시대 전기의 건물지가 확인되었으며 다량의 분청사기·백자제기가 출토되었다. 총 수량은 25점에 이르며 보·궤·희준·상준·대준·등·작·세 등 기종이 매우 다양하다. 이처럼 소비처가 확실한 일괄유물은 사례가 매우 드물기 때문에 그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출토된 도자제기들을 형태와 분장방법, 사료에 나타난 금속제기들과의 비교, 타 지역 출토품들과의 비교를 통해 제작시기를 추정한 결과 15세기 전반(1430~1450년), 15세기 중반(1450~1460년), 15세기 후반(1470년 이후)의 세 단계로 나눌 수 있었다. 도자제기들의 생산지는 15세기 전·중반에 운영되었던 양산 가산리 호포도요지와 15세기 후반에 운영되었던 양산 가산리 상리도요지로 추정되는데, 15세기 전반 제작품은 호포도요지에서, 15세기 중반·후반 제작품은 상리도요지에서 생산되어 가야진사로 공급된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가야진사유적에서 출토된 도자제기의 기종을 통해 당시 제의에 필요했던 금속제기가 대부분을 도자제기로 대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왕실의 제의에서는 일부 기종만 고급의 백자(청화백자)로 대체된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를 통해 가야진사가 늦어도 1420년대 제의를 시작하여 1430년대에 처음으로 도자제기를 도입하면서 호포도요지 생산 제기일괄을 공급받았음을 알 수 있다(1차 공급). 이후 1450년대에는 상리도요지에서 생산된 제기 일부 혹은 일괄을 다시 공급받았다(2차 공급). 하지만 1460년대 중반 인접한 낙동강의 범람으로 건물이 침수되어 제의가 중단되었다. 이후 보수와 개축을 거쳐 1470년대 중반 제의가 다시 재개되었으며, 이 때 상리도요지에서 생산된 제기일괄을 다시 공급받았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3차 공급). 한편, 2차로 사용된 건물지에서는 제단이 확인되지 않는데, 이는 1460~1470년대 개축과정에서 한양의 방위에 맞게 제단이 이동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본 논문에서는 용당리에 가야진사가 위치했던 15세기 약 100여 년간의 도자제기 사용과 이를 통한 제의의 운영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비석골로 이전해간 이후의 가야진사 현황에 대해서도 파악할 수 있는 조사가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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