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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姜眞周 (한국교통대학교)
저널정보
한국문화사학회 문화사학 文化史學 第59號
발행연도
2023.6
수록면
5 - 43 (39page)
DOI
10.29334/MHSH.2023.06.5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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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충주지역의 신라유적을 남한강과 달천을 경계로 동부와 서부지역으로 나누어 분포현황을 살펴본 뒤 유적의 성격에 따라 조성시기를 밝혔으며, 출토된 신라토기와 기존 연구성과를 반영하여 4단계로 구분하였다. 1단계는 6세기 중반~7세기초, 2단계는 7세기초~7세기후반, 3단계는 7세기후반~8세기후반, 4단계는 8세기 후반이후로 설정하였다. 1단계는 신라가 충주로 진출한 시기이며 2단계는 국원소경의 중심지가 탑평리일대에서 동쪽의 충주분지로 이동한 때이다. 3단계는 중원경으로 개칭하였으며 4단계는 신라하대로 지방세력이 성장하여 충주지역에 영향력을 끼친 시기이다.
진흥왕 18년(557)에 국원소경을 설치하고 이듬해 귀척자제와 육부호민을 사민시켰다는 기록의 근거로써 중앙탑면의 누암리고분군과 하구암리고분군 그리고 탑평리유적을 들고 있다. 그러나 551년 3월 진흥왕의 낭성 순행은 국원소경을 설치하기 이전에 이미 고구려의 국원을 차지한 것으로 보이며, 이는 누암리고분군과 탑평리유적에서 출토된 전기양식 토기에 대한 설명을 가능케 한다. 따라서 신라는 550년 이전에 충주로 진출한 것으로 이해되며 문헌과 물질자료가 어느 정도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기존에는 서부지역의 신라유적이 가장 빠르고 집중되어 통일기가 되서야 동부지역으로 확산되었다는 견해가 많았으나 호암동복합유적, 연수동 유적과 같은 1단계 고분이 조사됨에 따라 동부지역에도 6세기 중반에 신라인들이 정착한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누암리형대금구와 부가구연대 부장경호의 부장여부에 따라 서부지역이 위계가 높은 것으로 파악된다.
중앙탑면의 탑평리 유적은 국원소경의 중심지로 알려져있다. 그러나 3,4단계의 유물이 부재되어 2단계 중반경에 중심지가 이동된 것으로 보았는데, 최근 통일신라 건물지가 발견된 충주읍성를 중심으로한 충주분지일대로 옮겨간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가 처음 진출했을 당시 기반시설이 갖춰진 백제의 대규모 취락이 입지한 곳에 터를 잡았다가 673년 문무왕이 국원성을 축조한 이후 신문왕대에 지방제도가 완비됨에 따라 국원지역에도 새로운 정비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3, 4단계는 소규모의 고분유적만이 확인되어 당시 상황을 복원하기 어렵다. 다만, 4단계에 이르러 그동안 고분이 입지하지 않았던 금릉동에 당식과대와 동경이 부장된 분묘가 확인되어 새로운 세력의 성장을 감지할 수 있다. 또한, 요도천 인근의 환호유적과 견학리토성은 당시 물류유통과 관련된 호족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목차

요약
Ⅰ. 머리말
Ⅱ. 조사현황과 분포양상
Ⅲ. 유적의 조성 시기
Ⅳ. 신라의 진출시기와 정착과정
Ⅴ. 맺는말
참고문헌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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