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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박병섭 (일본 竹島=독도 연구넷)
저널정보
동북아역사재단 영토해양연구 영토해양연구 제25권
발행연도
2023.6
수록면
7 - 47 (4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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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정한’론이 비등하기 전인 1872년 육군대장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는 ‘정한’의 군사작전까지 세우고 있었다. 그는 실정으로 인한 내란의 발생을 ‘정한’으로 막으려 했던 것이다. 한편, 외무경 소에지마 다네오미 (副島種臣)는 동방 제패의 일환으로 제국주의적 ‘정한’론을 주장하고 독자적인 ‘정한’ 전략을 세웠다. 이들 사이고와 소에지마의 전략에는 결함이 있었다. 조선 동북부에서 군함이 입항할 수 있는 항구를 찾을 수 없기에 그 지방에 대한 군사 작전을 세울 수 없었다. 이 결함을 극복하기 전에 사이고, 소에지마 등 ‘정한’파 참의(參議)들은 정쟁에 패해 하야했다. 그러나 소에지마의 ‘정한’ 구상은 외무성 내에서 세와키 히사토(瀬脇壽人), 모리야마 시게루(森山茂) 등에게 이어졌다. 세와키는 조선 동북부에 잠입해 양항을 찾아 군항을 만드는 절차 등을 조사하려 했으나 외무성 내 반대로 그 조사만은 중지되었다. 한편, 모리야마는 미국의 페리 제독을 본받아 포함외교를 시도했다. 이를 위해 파견된 운요(雲揚)함 함장 이노우에 요시카(井上良馨)는 부산과 동해안의 수로를 조사하고 영흥만에 군함이 입항할 수 있음을 실증하여 동북부 항만 문제를 해결했다. 게다가 그는 모리야마에게서 포함외교의 효과가 거의 없다는 말을 듣자 사건을 일으킬 생각으로 운요함에 탄약을 가득 실은 후 조선 남해안·서해안의 수로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노우에는 드디어 요새가 되어 있다고 들었던 강화도의 수로를 측량해 조선수비대와 포격전을 벌였다. 이 강화도 사건을 들은 러시아 공사 에노모토 다케아키(榎本武揚)는 사건을 ‘전쟁의 원인’으로 간주하고, 일본이 부산을 점거해 최후통첩을 전해 수도로 진격함과 동시에 영흥만에도 상륙하고 조선을 압복할 것을 진언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오로지 포함외교를 진행시켜 강화도조약을 맺었다. 이즈음 에노모토는 러시아가 원산의 조차(租借)를 계획하고 있다는 정보를 얻어 외무경에 알렸다. 일본 정부는 러시아의 남하를 억제하기 위해서도 영흥만을 일본에 대한 개항지로 삼을 것을 고집하고 난색을 보인 조선 측에서 동의를 얻었다. 영흥만은 일본에게는 ‘정한’과 국제정치의 면에서 중요한 항만이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정한’론 정변 이전 ‘정한’ 계획
Ⅲ. 고종의 친정과 일본의 ‘정한’ 준비
Ⅳ.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
日本語要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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