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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유영옥 (동아대학교)
저널정보
동양한문학회 동양한문학연구 동양한문학연구 제65권
발행연도
2023.6
수록면
151 - 190 (4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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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逸>은 周公이 成王에게 지어 바친 訓體의 글이다. 그러나 안일에 대한 경계는 성왕뿐만 아니라 古今의 어느 군주에게도 적용되는 포괄적인 정치 덕목이기에, <무일>은 우리나라에서 오랫동안 매우 중시되었다. 周公은 ‘嗚呼’를 7번 써서 <무일> 총 19장의 내용을 역동적으로 交織하였다. 또 殷의 三宗을 예시하고 文王의 무일을 詳言하여 成王이 훈계를 가납해주길 호소하였다. <무일>의 내용은 세 가지다. 첫째는 稼穡의 어려움을 군주가 先知하는 것으로, 이는 <무일>의 강령에 해당한다. 둘째는 ‘無逸’이 ①勤勉과 節儉을 뜻하고, ②주색ㆍ구경ㆍ유람ㆍ사냥 등에 빠지지 말라는 뜻이며, ③항상 공손하고 공경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는 것이다. 셋째는 三宗과 文王은 無逸하여 享國이 길었고, 그에 반한 殷王들은 享國이 짧았다는 것인데, 조선에서는 無逸과 享國의 상관성에 대체로 동의하였다. 고려에서는 <무일>이 태조의 「훈요십조」에서부터 언급되어, 베껴 쓰거나 그림으로 제작되었고, 경연에서도 자주 진강되는 등 상서 총 58편 중 그 비중이 가장 높았다. 여말선초 성리학의 유입으로 <洪範>과 <大禹謨> 15장이 특히 중시되면서 <무일>의 중요도는 상대적으로 하향되었지만, 조선에서도 보편적인 정치철학으로서의 <무일>의 가치는 변함없이 높았다. 조선시대에는 殿閣의 명칭에 ‘무일’이 사용되었고 병풍과 그림도 계속 제작되었다. 특히 <無逸圖>는 <山水圖>와 대비되어 국가 흥망의 한 상징이 되었다. 무엇보다 조선에서는 농사와 관련된 <무일>의 언급이 가장 많았는데, 이때 <무일>은 <七月>詩와 짝하여 운위됨으로써 親耕 親蠶으로까지 그 활용 범위가 확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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