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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강봉룡 (목포대학교)
저널정보
국립해양유산연구소 해양문화재 해양문화재 제18호
발행연도
2023.6
수록면
101 - 125 (25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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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고고 및 문헌 자료를 통해서 흑산도 읍동포구가 통일신라 후기~고려시대에 한·중 사단해로를 잇는 ‘국제항’의 기능을 수행했을 가능성을 제기한 논고이다. 먼저 그간의 고고학 조사를 통해 읍동포구에서 확인된 관사터와 봉수터는 뱃사람들의 숙소와 통신 시설로, ‘무심사선원’으로 사명寺名이 밝혀진 사찰과 상라산 봉우리에서 확인된 제사터는 당시 뱃사람들의 무사항해를 기원하는 신앙처로 활용되었을 것으로 보았다. 이를 통해 읍동포구의 ‘국제항’적 면모를 살폈다. 다음에 흑산도 읍동포구의 이러한 면모는 한·중 횡사단해로의 항정航程을 구체적으로 기록한 9세기의 『입당구법순례행기』와 12세기의 『고려도경』을 통해서 살폈다. 그리고 『송사』와 『택리지』 등의 관련 기록을 통해서 이를 뒷받침하였다. 또한 『원사』 등의 기사에서 13세기 후 반 몽골과 고려가 해양전략적 관점에서 흑산도에 대하여 비상한 관심을 표명했던 사실을 확인하고, 이를 통해 흑산도가 동아시아 해로 상의 중요 길목에 해당하였음을 재삼 논의하였다. 그러나 14세기 중반경에 흑산도의 주민들이 영산강변 남포로 이주하여 ‘공도空島’로 전락하면서 흑산도의 ‘국제항’적 면모가 종식되었음을 살폈다. 그러다 17세기 후반에 흑산진이 설치 되면서 흑산도가 다시 공식적으로 ‘사람이 사는 섬’이 되긴 하였으나, 지속된 조선의 해금정책 海禁政策으로 인해 국제 거점항으로서의 위상은 끝내 회복하지 못하였음을 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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