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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채지수 (한국학중앙연구원)
저널정보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서울학연구 서울학연구 제93호
발행연도
2023.11
수록면
107 - 142 (36page)
DOI
10.17647/jss.2023.11.93.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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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심대는 한양 도성의 인왕산 언덕에 위치한 조선시대 명소였다. 세심대는 임진왜란 이전부터 한양에 거주하는 문인들의 거처이자 유람처로 애호되었다. 그러다 영조 연간 한성부 북부 순화방 일대에 왕실 사묘 건립이 활성화되면서 세심대 일대는 왕위 정통성을 상징하는 지역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특히 사도세자의 초기 사당이 세심대 밑에 건립되었다가, 동부로 이전하게 된 사건을 계기로 정조는 즉위 후 1791년 봄부터 1795년 봄까지 지속적으로 세심대를 찾았다. 이 시기는 정조가 사도세자의 명예회복을 위해 다양한 사업을 활발하게 추진하던 시기로, 정조의 세심대 행차 역시 이러한 그의 의도와 밀접한 연관을 지닌다. 정조는 먼저 세 차례의 세심대 연회에서 이루어진 갱재시축을 통해 봄 꽃 경관이 찬란한 인왕산과 도성의 경관을 묘사함으로써 태평성세의 기운을 형상화하였다. 그리고 을묘년의 화성 행차와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 직후 세심대에서 본격적으로 사도세자를 추모하는 분위기를 형성하였다. 사도세자가 탄생한 옛 을묘년에 인왕산에서 朴文秀가 읊어 성세의 기쁨을 표출하였다는 시에 차운함으로써, 비운의 인물인 사도세자의 이미지를 쇄신하고 명예를 회복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또 정조의 숙원이었던 갑자년의 구상을 세심대에서 신료들 앞에 언급함으로써, 사도세자 추숭을 향한 방향성을 알린 의미 있는 장소가 되었다. 그러나 정조의 사망으로 그의 꿈은 실현되지 못했고, 세심대에 부쳤던 그의 바람은 점차 희미해졌다. 세심대는 인왕산의 다른 명소에 비해 현대까지도 옛 경관을 유지하고 있는 전통성을 지닌 장소이다. 앞으로 세심대를 명소로 지정하여 보존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목차

Ⅰ. 서론
Ⅱ. 정조 연간을 기점으로 한 공간 인식 변모양상
Ⅲ. 갱재시 작품의 시적 형상화 특징
Ⅳ. 정조 사후 사그라진 殘影과 의미의 퇴색
Ⅴ. 결론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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