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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홍창우 (전남대학교)
저널정보
신라사학회 신라사학보 신라사학보 제59호
발행연도
2023.12
수록면
275 - 315 (4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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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궁예의 첫 번째 국호 ‘(후)고려’에 담긴 지향을 ‘일통삼한’의 맥락에서 살펴보려는 시도이다. 먼저 사서별로 제각각인 궁예정권의 국호 관련 기록을 점검하였다. 이를 통해 다음과 같은 점들을 알 수 있었다. 첫째, 궁예가 제정하고 고친 여러 국호를 일어난 순서에 따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사서는 하나도 없다. 둘째, 따라서 우리가 현재 궁예의 국호를 세 개로 이해하는 것은 사서들의 관련 정보를 ‘종합’한 결과이다. 셋째, 내부 논리를 고려했을 때 _삼국사기_는 궁예의 첫번째 국호를 의도적으로 은폐・편집했다. 이에 궁예는 ‘(후)고려’(901)를 세운 뒤 ‘마진’(904), ‘태봉’(911) 순으로 국호를 바꾸었음을 최종적으로 확인하였다. 이러한 토대 위에 첫 국호인 ‘(후)고려’에 주목해 논의를 이어 나갔다. 901년 궁예의 고구려 복국 발언은 초창기 궁예정권의 방향성을 고스란히 전해주고 있다. 다만, 이보다 1년 전인 10세기의 벽두에 정돈된 지향을 담아 백제의 부활을 선언했던 견훤과 비교했을 때 현저한 차이가 있었다. 이에 왕창근이 궁예에게 바친 古鏡 속 글귀의 내용과 이를 둘러싼 당대 해석 경합을 매개로, 마한-고구려-고려로 이어지는 궁예정권 내부의 정통론을 확인하였다. 또한, 잦은 국호 개변, 연호 제정, 수도 이전과는 별개로 전시기를 걸쳐 전방위적으로 진출하려 했던 점을 심중하게 받아들여 고구려를 중심에 둔 ‘일통삼한’의 노력이 지속해서 경주되었다고 판단하였다. 요컨대, 후고구려의 몰락 원인으로 종종 지목되었던 ‘고구려 지향의 포기’는 재고되어야 하며, 오히려 천년왕국 신라를 대하는 궁예의 극단적인 배격 정책과 이로 인한 지배층 내부의 분열과 이탈이라는 측면에서 후고구려의 치사를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국호 관련 기록의 검토
Ⅲ. 현실 인식과 당대 지향
Ⅳ.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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