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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추교찬 (인하대학교)
저널정보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한국학연구 한국학연구 제37호
발행연도
2015.5
수록면
75 - 130 (5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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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1908년 10월 조직된 제2기 인천일본인거류민단의 구성․운영․활동에 대한 것이다. 이 거류민단은 1905년 일본에서 제정된 거류민단법에 따라 이듬해 10월 조직된 되었다. 제1기 거류민단 임기가 종료될 무렵 발포된 민장 관선령은 재한일본인 사회를 혼란에 빠뜨렸고, 이 여파는 재인일본인 사회에도 밀어닥쳤다. 재한일본인 사회가 다양한 방식으로 저항한 반면, 재인일본인들은 자치제 수호보다는 통감부에 협력해 이권을 획득하려는 실리를 택하였다. 이 결정은 당시 인천에서 가장 절실했던 인천항 개선 문제와 관선령 반대운동을 교환한 것이었다. 이러한 결과로 1909년에는 인천 민장 부전경사의 자살 시도라는 사태를 불러오기에 이르렀다. 정국이 어수선한 가운데 출범한 제2기 재인거류민단에 닥친 문제는 공공성을 상징하는 인천병원 문제 해결과 인천항 개선이었다. 인천 지역의 대표적인 서양식 의료기관인 인천병원이 재정악화로 유지가 어렵게 되며 경성 일본인 의사에게 경영을 위임한 것은 인천 민단의 근본적 취약성을 드러내는 사건이었다. 또 세계적인 조수 간만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인천항을 개항장으로 선정한 점은 시간이 지날수록 문제를 노출하였고, 러일전쟁 때 건설된 월미철교는 이 상황은 더욱 악화시켰다. 재인일본인들은 관선령의 대가로 얻어낸 항만 개선 약속이 지체되자, 개항 이후 인천 최대 집회를 열며 통감부를 압박하여 그 결과 1911년 6월 축항 기공식이 실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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