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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은정 (충남대학교)
저널정보
한국고대사학회 한국고대사연구 한국고대사연구 제117호
발행연도
2025.3
수록면
101 - 130 (30page)
DOI
10.37331/JKAH.2025.03.117.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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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에서는 『일본서기』를 검토하여 효덕이 645년 아스카에서 나니와로 천도한 이후 사용한 궁의 실태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정궁으로 주목받는 풍기궁의 구조와 특징을 발굴 조사 성과를 바탕으로 분석한 후, 효덕조의 관료제와 풍기궁 조당에 설치된 거대한 조당의 의미를 생각해 보았다.
효덕은 나니와로 천도한 직후 둔창을 중건해서 거처로 사용하거나, 과거 영빈관으로 사용했던 건물을 허물고 새로 지은 궁에서 생활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이궁은 천황을 정점으로 한 관인 질서를 구축하고자 했던 효덕의 통치이데올로기를 구현하기에는 충분치 않았다. 이에 효덕은 백치 3년(652)에 자신이 지향했던 정치 이념을 구체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미경궁 즉, 풍기궁을 건설하였다.
풍기궁은 종래 천황의 공적인 정치 공간인 동시에 사적인 생활공간으로 사용된 대전과 달리, 내리 구획을 후전과 전전으로 명확하게 구분하였다. 전자는 사적인 성격이, 후자는 공적인 성격이 강한 공간이었다. 그리고 내리 구획 남쪽에 14당 이상의 당(청)과 넓은 뜰을 갖춘 거대한 조당을 설치하였다. 이러한 조당의 규모와 구조는 효덕이 나니와로 천도하기 이전 아스카에 건설된 왕궁은 물론, 654년 아스카로 환도한 이후 694년 지통이 大和 藤原지역에 등원궁을 건설하기 전까지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것이었다.
관료제가 충분히 발달하지 않았던 효덕조에 14당 이상의 당(청)과 넓은 뜰을 갖춘 거대한 조당을 설치한 이유는, 7세기 중반 倭 조정이 처한 현실과 효덕조가 추구한 미래를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부민제 또는 씨족제적 요소가 강하게 남아 있는 상황에서 효덕은 천황을 정점으로 한 관인 질서를 구현할 명분과 공간이 필요했으며, 풍기궁의 조당은 그러한 효덕의 통치이데올로기를 표현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풍기궁의 내리와 조당에 드러난 효덕조의 혁신성은 바로 이러한 효덕조의 고민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일본서기』에 기술된 대화개신의 내용을 사실로 받아들이기에는 여전히 적지 않은 의문점이 남는다. 하지만 적어도 풍기궁의 구조에 드러난 효덕조의 혁신성을 생각하면, 대화개신의 의의는 재평가될 여지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難波 천도와 효덕조의 諸宮
Ⅲ. 難波長柄豊碕宮의 구조와 특징
Ⅳ. 조당과 관료제
Ⅴ.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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