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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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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위논문
저자정보

배홍철 (서울시립대학교, 서울시립대학교 일반대학원)

지도교수
서우석
발행연도
2013
저작권
서울시립대학교 논문은 저작권에 의해 보호받습니다.

이용수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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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의 연구 히스토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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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조선사회에서 ‘나체화(裸體畵)’는 여성의 알몸을 그린 그림을 지칭하는 용어로, 서양미술의 유입과 인쇄출판의 성장 속에서 등장하였다. 나체화 중에서도 누드화는 서양예술의 하나로 많은 관심을 받았으며, 동시에 풍속을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검열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본 연구는 1920년대 다양한 나체화의 수용 과정을 살펴보고 이 중 서양 누드화가 예술로 정착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검열의 생산적 역할을 알아보고자 하였다.
기존 연구들은 누드화 논란이 서양미술에 대한 이해 부족과 당대 유교적 사회 분위기 속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았다. 또한 총독부 검열이 일부 누드화를 외설로 간주하고 통제하여 누드화가 예술로 정착하는데 걸림돌이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1920년대에는 다양한 여성의 알몸을 그린 나체화가 사회적 허용아래 범람하였다. 신문·잡지에는 성애(eroticism)와 연관된 여성 나체 삽화와 일본의 성(性)서적 광고가 수록되었다. 한편 1922년 총독부가 주도한 조선미술전람회가 개최되면서 서양 누드화가 대중 앞에 등장하였다. 나체화가 범람하던 시기, 누드화는 서양미술이자 동시에 성애의 도상(圖像)이었으며, 예술과 외설의 경계는 불분명하였다.
1920년대 후반 풍속 검열이 강화되면서 누드화를 비롯한 많은 나체화들이 제재를 받았다. 검열은 외설(obscenity)의 범위를 구체화하였으며 외설과 예술의 분화를 주도하였다. 이 과정에서 검열은 예술을 억압하는 장치였다기보다는 나체화 생산과 감상의 규율이었다. 이후 예술과 외설의 경계는 1930년 풍속 검열의 완화 이후로도 지속되었으며 누드화를 예술로 간주하고 감상하는 생활양식이 정착하였다.
푸코(M.Foucault)는 권력을 단순한 억압적 장치가 아닌 생산적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그의 설명처럼 풍속 검열은 예술과 외설이라는 새로운 지식(savoir)을 생산하고 나체화를 둘러싼 담론을 선동하였다. 특히 상급 교육기관과 영향력 있는 미술협회가 부재했던 당시 조선사회에서 검열은 예술과 외설을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이었다.

목차

제1장 서론 1
제1절 연구의 배경 1
제2절 연구의 목적 3
제2장 이론적 배경과 선행연구 4
제1절 예술과 제도화 4
1. 이론적 논의 4
2. 선행연구 5
제2절 외설과 제도화의 장치로서 검열 7
1. 이론적 논의 7
2. 선행연구 10
제3절 여성나체화와 예술외설 논의 13
제3장 연구의 방법과 대상 17
제4장 여성 나체화의 수용과정 20
제1절 일본의 여성 나체화 수용과정 20
제2절 한국의 여성 나체화 수용과정 26
1. 서양 누드화와 조선미술전람회 26
2. 출판물에 나타난 나체화 33
제5장 총독부 검열과 외설의 규정 53
제1절 검열의 양상 54
제2절 풍속검열과 외설 58
제6장 검열과 예술의 제도화 71
제7장 결론 79
참고문헌 82
부록 94
女及び妻の性的生活(1923) 목차 94
女の肉的究(1927) 목차 95
男女生殖器解全書(1925) 목차 95
結婚初夜の知識(1928) 목차 96
조선경찰월보 풍속검열 단행본 현황(1928.9~1931.11) 98
Abstract 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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