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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위논문
저자정보

나은주 (국민대학교, 국민대학교 대학원)

지도교수
문창로
발행연도
2013
저작권
국민대학교 논문은 저작권에 의해 보호받습니다.

이용수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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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의 연구 히스토리 (2)

초록·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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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관등제도는 왕경인에게는 京位를 수여하고, 지방인에게는 外位를 수여하는 이원적인 체제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통일기 이후 관등제는 경위로 일원화된다. 이러한 변화에 주목하여 외위제 폐지와 관련된 주요한 사료인 『三國史記』 職官志 外位條를 검토해 보았다. 그 결과 사료 내에 몇 가지 오류가 있지만 외위제가 문무왕 14년에 폐지되었다고 추론할 수 있었다.
외위제가 문무왕대에 폐지된 배경은 당의 제도를 수용하여 새로운 지배체제를 정비해나가던 중대왕실의 한화정책과 함께 삼국통일을 위한 전쟁이 진행되던 시대적 상황과 관련이 있다. 신라의 이원적인 관등체제는 새로운 지배체제의 확립과 대내적인 안정화를 이루기에 효율적이지 않았다.
6세기 금석문과 『삼국사기』와 『일본서기』 등 문헌자료에 등장하는 외위 소지자들은 평상시에는 일반촌락민을 동원하여 築城과 立碑 같은 작업을 수행했고, 전시상황에서는 군사력을 동원하여 직접 전투에 참가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공동체적 질서에 입각해 이루어졌는데, 전쟁이 심화되면서 공동체보다는 가문을 중시하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기존에 신라가 지방민에게 외위를 수여하여 지방민을 포섭하던 방식의 필요성을 재고하게 하였을 것이다.
외위제 폐지에 앞서 문무왕 13년에 신라는 백제인에게 관등을 수여하였는데, 內·外官으로 나누어 각각 경위와 외위를 적용하였다. 하지만 일원적인 관등체계를 지녔던 백제인에게 외위제의 수여는 애초부터 지켜지기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선덕왕대부터 지방민에게 외위 대신 경위를 수여하는 경우가 생기게 되는 등, 외위제가 동요되는 모습이 나타나게 된다. 이렇게 제도가 흔들리게 되면서 외위제는 폐지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외위제 폐지 이후 신라는 지방제도의 개편을 통하여 재지의 유력세력을 매개로 하여 지방을 통치하던 방식 대신 직접 지방사회에 국가권력의 영향을 미치려 하였다. 지방에 대한 통치력의 강화는 신문왕대 9주 5소경의 완비로 이어지게 되었다. 동시에 도성의 진골 귀족을 소경으로 사민시킴으로써 왕권의 강화를 도모하려 하였다.
그러나 외위제가 폐지되면서 법제적으로는 왕경인과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었지만 실제로는 골품제에 편입되지 못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흥덕왕 9년 교서에서 진촌주와 차촌주를 각각 5두품과 4두품으로 규정하였는데, 9세기 주조된 鍾銘에 등장하는 촌주들이 6두품에 해당되는 관등을 소지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이는 여전히 지방민에 대한 차별 인식이 존재하였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결국 외위제의 폐지는 중대왕실의 성립과 통일전쟁의 수행이라는 시대적 흐름에 따라 이루어진 것으로, 지방에 대한 국가권력의 영향력이 점차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일원적인 관등체제로 변화했다고 하여 지방민의 지위가 상승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지방민에 대한 차별 인식은 여전히 존재하였으며, 골품제 내에 편입되지 못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외위제의 폐지 배경
1. 『三國史記』 職官志 外位條의 검토
2. 역사적 배경
Ⅲ. 외위제의 동요와 폐지
1. 외위 소지자의 성격 변화
2. 외위제의 동요
Ⅳ. 외위제 폐지 이후 지방민의 변화
1. 9州 5小京 중심의 지방통제강화
2. 지방민의 지위변화
Ⅴ. 맺음말
參考文獻
日文抄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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