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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 문 요 약
일제하 한국 기독교의 일본인식 연구
- 「內地」개념을 중심으로 -
본 논문은 ‘內地’라는 개념에 집중하여 일제 치하의 한국 기독교가 일본을 어떻게 인식해 갔는지를 규명하고자 하였다. ‘내지’라는 말은 ‘조선을 의미하는 보통명사’였지만, 강제병합 이후 ‘일본만을 의미하는 고유명사’가 되었다. 즉, ‘내지로서의 일본’을 일제하 기독교가 어떻게 수용하였는지, 동시에 ‘內地’의 반대 개념인 ‘外地’로 전락한 內地 상실의 자아’를 어떻게 내면화 하였는지를 고찰함으로 당시 한국 기독교인들의 ‘일본 인식’을 규명하고자 하였다.
이 논문은 일제를 네시기로 구분한 통시적 접근으로 각 시기의 일본인식의 특징을 살펴보았다. 먼저 한일병합 이전 시기(1894-1905)에서, 척왜를 표방한 동학과 일반 민중의 정서와는 거리를 두었던 한국 기독교의 일본 인식을 고찰했다. 서구적 근대화를 선교 목적 달성의 중요한 수단과 통로로 인식했던 기독교는, 조선에 만연해 있던 배일 정서와 비교할 때, 메이지유신을 통해 먼저 근대화를 달성하여 서구적 면모를 갖춘 일본에 대해서, 반드시 알아야 하는 대상, 혹은 배워야 하는 대상으로 인식했다. 즉 ‘지일과 학일’의 일본 인식이 경계가 불분명한 채 교차하는 시기였다. 그 결과 그 당시의 한국 기독교는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냉소적이었으며, 청일전쟁에 대해서도 일본의 기독교계와 마찬가지로 ‘의전론’이 힘을 얻었다. 이후 러일전쟁에 대해서도 안전한 선교 환경의 확보를 위해 일본을 지지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청일전쟁 직후 발생한 을미사변(1895)과 을사늑약(1905)으로 인해 일시적인 반일 인식이 기독교인들 사이에 형성하기도 했지만, 병합 이전 시기에 한국 기독교가 지닌 일본인식의 특징은, 근대 일본을 조선의 모범을 설정한 ‘지일과 학일’의 정서가 교차(交叉)한 시기였다.
두 번째 ‘무단통치 시기’(1910-19)는 ‘내지조선’이 자신의 고유한 ‘내지성’을 상실하고, ‘외지’로 전락한 직후의 시기를 의미한다. 동시에 ‘내지일본’이 새로운 ‘내지’로 교체된 자아 상실과 비아 강요의 충격적 상황이었다. 이처럼 안과 밖이 전복된 아노미 상황 하에서 한국 기독교는 항일의 성격을 강화해 갔다. 일본 정부는 일본조합교회의 ‘조선전도론’을 통한 한국 기독교의 ‘내지화’를 도모하였지만 결국 그 시도는 실패하였다. 그 이유는 1919년 2.8 독립선언 및 3.1독립운동을 둘러싼 일본 인식의 변화 과정에 한국 기독교가 깊이 관여돼 있었기 때문이다. 즉 3.1운동으로 종언을 고한 무단통치기의 한국 기독교는 ‘항일의 고양(高揚)’을 통해 ‘내지상실-외지화’라는 국권 피탈 현실을 극복하려던 시기라고 규정할 수 있다.
세 번째 ‘문화통치 시기’(1920-30)는, 3.1운동을 통해 한국인의 ‘내지조선’의 정체성이 쉽게 상실되지 않음을 절감한 일제 당국이, ‘내지조선’의 자의식을 일정 부분 존중해 주면서 ‘외지로서의 조선’을 점차 ‘내지로서의 일본’으로서 동화해 가는 전략이 구사된 시기이다. 즉 ‘내지일본’을 강요하던 무단통치 시기와는 다른 ‘내지조선’이라는 고유성을 지킬 수 있는 여유 공간이 마련되었다. 그 결과 이 시기의 한국 기독교도 병합 이전의 민족 주체성 회복을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이 시기의 총독부는 교묘하게 ‘친일인식’의 확대를 유도하는 기만정책을 전개해 한국 교회의 ‘내지성 회복’에는 근본적 한계가 있었다. 즉, ‘반일’의 자유가 일정 부분 허용되어도, 그 자유는 항일의 긴장감을 완화시켜 어느덧 친일의 논리에 굴복하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문화통치 시기의 특징은 ‘반일과 친일의 길항(拮抗)’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그 점을 규명하기 위해 「기독신보」의 보도 경향, 상해임정 초기 기독교 그룹, 우민화 정책에 저항한 기독교 절제운동, 조선 YWCA의 창립 과정의 의미 등을 고찰하였다.
네 번째, 전시체제기(1931-45)에서는,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을 거치면서 급속히 엄혹해진 전시동원 체제의 상황을 ‘내지’ 인식의 변화와 관련해서 검토하였다. 무엇보다도 ‘내지’ 개념이 1930년대 들어서면서 어떻게 다시금 한국 기독교계에 확대, 보급, 침투해 들어왔는지, 내선일체, 창씨개명과 국어교육, 내지교회와의 합동, 반도 개념, 팔굉일우 개념, 성전 개념 등의 내면화 과정을 고찰하였다. 이러한 내지 개념들을 그 당시 한국 기독교는 극소수의 저항 세력을 제외하곤 대부분 적극 수용하고 내면화 시켜갔다. 결국 이 시기 한국 기독교의 일본인식은 철저한 ‘내지화’를 지향한 ’부일로의 전도(顚倒)’로 규정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 논문은 ‘일제하’라는 시기의 범주 안에서 한국 기독교인들의 일본인식의 유형론을 공시적(共時的)으로 검토하였다. 그 결과 ①신념적 내지 수용형(반일) ②배반적 내지 수용형(부일), ③내외지 초월형(극일), ④임시적 내지 수용형(반일), ⑤비타협적 내지 거부형(항일)으로 나누어 일제하에서 등장한 다양한 일본 인식을 ‘내지 인식’이라는 범주에서 유형화하였다. 이러한 제 유형은 ①‘지일→반일→항일’의 흐름과 ②‘학일→친일→부일’의 흐름이 교차와 길항, 심지어는 상극을 이어갔다. 이러한 역동적인 과정은 결국 모두 ‘극일’에 도달하기 위한 저마다의 다른 신념과 방법론이 충돌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해방 이후 ‘내지’를 회복한 한국 신학이 이른바 ‘내지신학’으로서의 일본신학의 한계를 넘어서서, 새로운 주체적 신학의 창출을 이룩했다는 사실도 ‘극일’(克日)의 범주에서 고찰하였다.
본 논문은 ‘내지’ 개념에 초점을 맞추어 각 시대별 일본 인식의 변화 과정을 살핀 통시적 접근과 일제하 ‘일본 인식’을 인물별로 유형화한 공시적 접근을 병행했다. 현재의 한국사회와 한국 기독교의 일본인식에도 소위 ‘반일과 친일’이라는 대표적인 일본 인식의 유형의 형태로 상극(相剋)하고 있다. 그러므로 한국 기독교에게 ‘내지’는 과연 어디인지를 묻는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며, 이러한 관점의 일본 인식 연구는 앞으로도 추가되어야 할 ‘현재진행형’의 과제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