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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위논문
저자정보

김선영 (울산대학교, 울산대학교 대학원)

발행연도
2015
저작권
울산대학교 논문은 저작권에 의해 보호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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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의 연구 히스토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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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 문 요 약

일제강점기
울산 방어진 지역 자본가의 성격과 활동
김선영


일제강점기 울산 동면 방어진은 어족이 풍부하고 어업활동을 하기에 적합한 환경으로 천혜의 어장이라 불리었다. 전국 각지의 어업가들은 어업활동으로 부를 축적하기 위해 방어진으로 입항했으며 그들을 대상으로 영업을 하고자 하는 상인들도 잇따라 입항했다. 이로 인해 방어진에는 1910~20년대 어업과 상업을 영위해 재산을 축적한 일본인 자본가들이 생겨났다. 1910~1920년대 방어진에서 활발하게 활동한 자본가들은 대부분 일본인이었다. 이들은 경제력을 바탕으로 지역정치에도 참여해 지역사회를 주도해나가며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울산 동면 지역의 중심지가 조선인들의 전통적인 중심인 서부리에서 일본인들의 거점인 방어진으로 이동할 만큼 일본인들의 세력이 커졌다. 방어진의 유력자인 나카베 이쿠지로(中部幾次郞)를 중심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본인 자본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방어진은 이러한 일본인 자본가들이 세운 회사?조합?상점들이 들어서게 되면서 점차 번화가로 변모했다.
1910년에서 1920년대 중반까지는 일본인 자본가들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상대적으로 어업이 발달한 일본인 어업가들이 근대적인 어구와 동력선을 이용해 방어진의 어족자원을 거의 일소(一掃)하다시피 했다. 때문에 그만큼 조선인 어부들의 어획고는 줄어들게 되어 민족 간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다. 일본인들에 의해 어업활동에 제약을 많이 받았던 조선인 어업가들은 그들과 경쟁이 되지 않을 정도로 곤궁해졌다.
그러다 1920년대 후반이 되자 경제력을 갖춘 조선인 자본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바다를 면해 있던 일산리, 전하리, 염포리 그리고 화정리 출신들이었다. 반농반어 마을에서 전통적인 어업방법을 영위했던 조선인 어업가들은 일본인들로부터 간접적으로 근대를 경험하게 되면서 점차 자본주의체제로 편입되어갔다. 이들 중에서는 일본의 근대적인 어업법을 모방해 어업활동에 성공한 이들도 있었다. 어업과 상업으로 성공해 신흥 자본가로 성장하면서 지역정치에도 참여하기 시작했다.
1927년, 일본인과 조선인의 합자회사인 방어진주조주식회사가 설립되었다. 방어진주조주식회사는 설립초기에 히라마츠 히데오[平松秀夫]라는 일본인이 대표를 맡았으며, 일본인 유지와 조선인 유지 반반으로 구성되었다. 당시 대표적인 조선인 자본가였던 김두헌(金斗憲)과 윤덕호(尹德鎬)도 회사 설립에 참여했으며, 방어진주조주식회사의 설립은 조선인 유지들이 자본가로 참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회사 설립 3년 뒤에는 화정리 출신 자본가 윤덕호가 회사를 인수해 조선인만으로 임원을 새롭게 구성했다. 구성된 임원은 윤덕호와 함께 방어진소비조합을 운영했던 지인들로 이루어졌다.
방어진은 일본인?조선인 자본가들이 경영했던 공장의 특징을 극명하게 비교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일제강점기의 식민지성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지역이다. 일본인 자본가들은 대부분 설립비용이 많이 들고 생산성이 높은 비료공장?통조림공장?철공조선소 등을 경영해나갔다. 반면 조선인 자본가들의 업종은 소자본으로도 설립 및 경영이 가능한 양조업?정미업?상업에 한정되어 있었으며, 대부분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영업을 했다. 방어진은 일본인들이 득세한 곳이라 조선인 자본가가 진출할 수 있는 업종에는 분명 한계가 있었으나 조선인 자본가들은 도태되지 않고 그 안에서 나름대로 발전해 나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시대의 흐름에 어쩔 수 없이, 혹은 적극적으로 편승한 결과 조선인 자본가들은 대부분 식민지 지배체제에 순응해 체제내화 되어갔다.
방어진은 1930년대 후반 전시체제기로 접어들면서 군수물자와 관련한 공장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방어진철공조선소는 호황을 맞이했다. 이렇게 일자리가 많은 공장에 취직하기 위해 전국의 조선인 노동자들이 방어진에 유입되었다. 덕분에 조선인 인구가 급격히 증가해 일본인 인구를 훨씬 넘어서게 되면서 조선인을 대상으로 하는 이러한 한정적인 업종, 즉 정미업과 양조업이 호황을 맞았다. 윤덕호의 방어진주조주식회사와 방어진정미소는 이러한 특수한 상황 덕분에 운영이 잘 되었다. 이러한 점은 전시체제기 몰락하거나 쇠퇴했던 조선인 공업의 전국적인 현상과 차이를 보이는 방어진만의 특수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해방이후 일본인들이 공장을 매각하고 자산을 모두 챙겨 본국으로 돌아감에 따라 방어진은 급격히 쇠퇴했으며, 어장 또한 황폐화되어 더 이상 어업과 공업을 영위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방어진이 일본인에 의해 근대화되기는 했지만, 그 개발이 조선인을 위한 것이 아닌 수탈과 착취를 위한 개발이었으며, 방어진이 철저한 식민지도시였음을 입증한다.

목차

목 차
Ι. 서론 1
Ⅱ. 방어진 개발과 일본인 자본가의 활동 4
1. 개항 이후 일본인 유력자에 의한 방어진 개발 4
2. 일본인 자본가의 회사 설립과 경제활동 11
Ⅲ. 조선인 자본가의 성격과 활동 18
1. 조선인 자본가의 등장 18
2. 관권결탁형 자본가 김두헌 21
3. 지역토착형 자본가 윤덕호 28
Ⅳ. 결론 33
참고문헌 35
ABSTRACT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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