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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위논문
저자정보

박민주 (동아대학교, 동아대학교 대학원)

지도교수
홍순권
발행연도
2016
저작권
동아대학교 논문은 저작권에 의해 보호받습니다.

이용수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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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의 연구 히스토리 (2)

초록·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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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은 개항 이후 일본인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일본인들은 초량의 전관거류지를 중심으로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장해 갔다. 그 과정에서 도시기반 시설의 정비가 함께 이루어졌다. 부산의 근대 하수도 시설도 이 시기부터 건설되기 시작했다. 부산의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거주지를 위생적으로 만들고, 전염병을 예방하기 위해 근대 하수도 시설을 건설하였다. 또한 이러한 하수도 건설은 당시 도시개발 열풍과도 연관이 있었다.
그리하여 개항 이후부터 1920년대까지 꾸준하게 하수도 공사가 진행되었다. 이 시기에는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였던 현재의 충무동, 남포동, 동대신동, 초량동, 좌천동 부근에 하수도가 건설되었다. 그러나 이때의 하수도 건설은 체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그나마 건설되었던 시설도 일본인 거주지의 비위생적인 상황을 해결해주지 못했다. 이것은 1929년부터 시작되는 ‘제1기 부산 하수도 건설사업’(이하 제1기 사업)의 배경이 되었다.
제1기 사업은 1927년부터 논의가 시작되었다. 1927년 부산부협의회에서 사업 실시 구역과 예산 확보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50만 5천 원 규모의 5개년 공사를 내용으로 하여 사업을 진행하기로 하였다. 이후 제1기 사업은 1929년에 총 공사비 26만 원의 3개년 사업으로 최종 결정되었다. 사업 구역은 대창정(大倉町), 본정(本町), 서정(西町), 부평정(富平町), 서부평정(西富平町), 좌등정(佐藤町), 영정(榮町)이 선정되었다. 이들 지역은 당시 부산에서 일본인 인구가 많았던 지역이었으며, 상업 중심지였다.
사업 내용이 확정된 이후, 1929년부터 제1기 사업 공사가 시작되었다. 공사는 본정부터 시작되어 서정, 부평정, 서부평정, 영정, 좌등정, 대창정 순으로 이루어졌다. 제1기 사업은 1932년 총독부가 설계와 같이 준공되었음을 인정하면서 종료되었다. 소요된 실제 공사비는 25만 6500원이었다. 사업이 완료된 이후 부산부는 독자적인 세출 항목으로 「하수비(下水費)」를 편성하여 하수도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제1기 사업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공사로 인한 부민 피해가 발생하기도 했다.
한편, 제1기 사업은 사업 이전의 하수도 공사와 마찬가지로 민족 차별적인 성격을 띠어 조선인 거주 지역을 제외한 채 진행되었다. 조선인들은 부산에서 일본인 거주지 외곽에 주로 거주하였다. 조선인 지역은 인구 증가로 인해 낙후되었으며, 도시 기반시설 건설에서도 배제되었다. 앞선 상황들은 조선인들의 생존을 위협했지만, 식민권력은 이를 외면하였다. 이와 같은 민족 차별적인 시정(市政)에 조선인들은 불만을 표출하였는데, 그 사례의 하나가 1934년 부산부회에서의 조선인 의원 사퇴였다. 1934년 부산부회에서 조선인 의원들은 조선인 지역의 위생 시설 확충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 요구는 부회 내에서의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이루어지지 못했고, 조선인 의원들은 사퇴하기에 이르렀다. 조선인 의원 사퇴는 이후 부산부의 설득에 의해 끝내 철회되었지만, 조선인들이 도시 기반시설 정비를 절실하게 필요로 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였다.

목차

Ⅰ. 머리말 1
Ⅱ. 개항 이후 1920년대까지의 부산 하수도 건설 3
Ⅲ. 사업의 수립과 시행 8
1. 사업계획의 수립 8
2. 사업 시행과 결과 18
Ⅲ. 사업의 한계와 조선인 배제 24
Ⅳ. 맺음말 29
참고문헌 31
Abstract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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