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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위논문
저자정보

안정준 (연세대학교, 연세대학교 일반대학원)

지도교수
하일식
발행연도
2016
저작권
연세대학교 논문은 저작권에 의해 보호받습니다.

이용수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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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의 연구 히스토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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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고구려가 낙랑?대방군 고지를 차지했던 4세기 초반 이후부터 이 지역에서 나타나는 독특한 고고학적 양상을 새롭게 차지한 영역에 대한 과도적 통치 방식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해보았다. 이를 통해 정치체제의 발전 단계만을 기준으로 지역별 통치 방식을 일반화해왔던 연구 경향을 벗어나서, 4~5세기 당시의 주변 정세 속에서 다양한 종족 구성원의 이해관계를 반영한 점령지 지배가 부분적?한시적으로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제시해보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우선 고구려가 1세기 대부터 2郡 지역을 장악해 가는 과정, 그리고 2군의 소멸을 전후한 시기에 이 지역 토착 세력들이 잔존했던 양상을 살펴보았다. 2군 지역은 3세기 말부터 이미 군현지배의 틀이 무너졌고, 과거 군현 지배층의 거주 범위와 그들의 정치?사회적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는 매우 제한된 상황이었다. 이러한 양상을 근거로 고구려가 4세기 초반 이래로 2군 고지 전반을 영역화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2군이 최종 소멸했던 4세기 초반을 전후하여 평양 중심부를 비롯한 일부 지역의 군현 지배층은 다른 곳으로 이주했거나 고구려에 의해 제거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지역에 토착 세력의 고분 조영이 지속된 현상 등을 고려할 때, 고구려가 4세기 초반부터 황해도?평안도 지역의 토착 사회를 전반적으로 재편했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기존 군현 통치기의 사회 구성 형태를 어느 정도 유지한 가운데 고구려의 통치를 받았던 사례도 존재했다.
한편 2군 고지에서 다수 발견되는 중국계 이주민과 관련된 고분 자료의 이해를 위해 4세기에 고구려가 중국계 유이민을 수용했던 과정 및 2군 고지에 이들을 안치했던 배경을 살펴보았다. 고구려는 後漢末인 2세기 말부터 중국계 유이민을 수용하는 정책을 지속했던 것으로 보이며, 4~5세기에는 주변 국가와의 세력 경쟁으로 인해 보다 적극적인 확보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는 다수의 이탈 주민이 발생하였던 2군 고지에 중국계 이주민을 안치시켰는데, 그 범위는 안악?봉산?평양시?남포시 강서구역?순천 등 비교적 다양한 지역에서 나타나며, 이들의 정치?사회적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는 매우 제한된 지역 내에만 국한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4세기 초반 이래로 고구려가 2군 고지 전반을 확고하게 장악했던 가운데, 그 지역의 토착 집단을 지배하에 두고 있었다는 점, 고구려가 2군 고지의 일부 지역에 중국계 이주민을 안치했던 배경이 2군 고지 전반의 통치를 위임하기 위한 것이 아닌, 수취 기반의 확대 목적이 강하다는 점 등을 고려한다면, 2군 고지의 통치 방식을 기존의 이해와는 다르게 상정해볼 필요가 있다.
2군 고지의 토착 세력들 가운데는 낙랑군 중심부의 주민처럼 고구려의 진출 과정에서 제거된 경우도 있지만, 그 외에는 고구려에 歸附해오는 경우가 다수였을 것이다. 고구려는 이들을 대상으로 기존 군현 통치기의 편제 형태를 한시적으로나마 유지시켰을 가능성이 있다. 즉 기존의 군현식 토지?호구 편제를 한동안 유지하는 가운데, 고구려 중?상위급 지방관이 최종 보고를 받고 稅役을 간접적으로 징수했을 것이다. 이러한 지배 형태는 보통 관할권을 위임받은 群小 세력가들의 당대에 한하여 허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의 이러한 2군 고지 통치 방식은 4세기 중?후반에 일부 지역에 새롭게 안치시킨 중국계 이주민 집단의 지배 방식과도 관련하여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동수?동리?장무이?진 등 망명인들의 개별 관할지 내에는 幽州와 遼東 等地에서 온 이주민이 있었으며, 이주민이 안치되기 전부터 원래 거주했던 韓?穢人을 비롯해 2郡 출신을 표방하는 일부 토착 주민도 함께 편성되었다. 토착민까지 포함된 이러한 관할지 구성은 고구려에 의해 2군 고지의 일부 지역에 안치되었던 개별 망명인이 임의로 편성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원래 지역에 거주했던 토착민과 새로 안치된 이주민을 포함한 수취 체계를 재구성하는데 있어서 고구려 官人의 개입이 있었을 것이며, 이후에도 고구려의 중?상급 지배 단위 아래에 두어져 관리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4세기 초반에 2군 고지를 차지한 고구려는 점령과정에서 귀부하였던 토착 지배 세력의 정치?사회적 지위를 일정 기간 유지하고, 기존의 토지?호구 편제를 한동안 유지하는 가운데 지배하였다. 이 지역들은 대체로 4세기 중반 무렵부터 기존 세력가의 통치 권한이 종료되었을 것이며, 지배 구조가 재편되면서 城 단위의 정식 고구려 행정 단위명을 부여받게 되었을 것이다. 다만 중국계 이주민은 4세기 중후반 이후에도 2군 고지에 안치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관할지는 예외적으로 2군 고지에서 비교적 늦은 시기까지 유지되기도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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