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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위논문
저자정보

전상우 (단국대학교, 단국대학교 대학원)

지도교수
전덕재
발행연도
2017
저작권
단국대학교 논문은 저작권에 의해 보호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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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의 연구 히스토리 (2)

초록·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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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590년대 초반 고구려의 신라 阿旦城 공략 배경과 더불어 이것이 7세기 정세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 살핀 것이다. 6세기 중반 고구려는 백제와 신라의 공격으로 한강유역을 상실했다. 고구려는 서북방에서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서, 신라는 대중국 교통로를 확보하기 위해서 552년 무렵에 두 나라는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565년 신라가 北齊로부터 東夷校尉에 책봉되면서 정세가 변하기 시작했다. 특히 東夷校尉라는 관직은 北魏 世宗과 고구려 사신 芮悉弗의 대화에서 보이듯이 동이 세계의 대표라는 상징이었다. 즉, 고구려의 우위를 대외적으로 공인받은 것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東夷校尉라는 관직이 고구려뿐만 아니라 신라의 책봉호로 수여되었다는 사실은 565년을 전후로 하여 北齊의 삼국 인식에 변화가 있었음이 반영된 결과로 추정된다. 고구려는 4~5세기를 정점으로 하여 독자적인 천하관을 구축해 신라를 그 천하관 안에 규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라의 한강유역 점령과 東夷校尉로 상징되는 대외적 공인으로 인해 고구려인의 천하관에 심각한 균열이 발생했다. 이에 고구려는 자국 중심의 질서를 재구축한다는 기치 하에 새로운 대외정책을 추진하였다. 고구려는 한동안 北齊와의 관계를 중단하고 陳, 倭와 교섭하여 신라를 견제하기 시작하였는데, 신라 역시 고구려의 움직임에 대응하면서 고구려와 신라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北齊의 멸망으로 돌궐과 高保寧이 흥기하면서 요하 일대에 위기가 발생해 고구려는 기존의 외교정책을 수정하고 요하에 관심을 집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궐과 高保寧 세력을 제압한 隋가 재차 요하 일대에 영향력을 행사하자, 결국 고구려는 군사행동에 나서게 되었다.
『三國史記』 列傳第5 溫達條에 ?陽王이 즉위한 후에 고구려가 신라의 阿旦城을 공격한 기사가 전한다. 교전 시점에 대한 명확한 언급이 보이지 않는데, 정황상 고구려와 隋의 관계가 회복된 591년 3월 이후에서 신라가 隋에 처음으로 사신을 보낸 594년 사이로 짐작된다. 阿旦城 전투가 벌어진 장소는 현재로서 서울 峨嵯山城일 가능성이 보다 높다고 추정된다.
590년대 초반 고구려의 신라의 阿旦城 공략은 고구려와 신라의 동맹 결렬을 의미했다. 이후 고구려는 신라의 한강 하류를 지속적으로 공격하였는데, 이에서 竹嶺 일대로 표현된 고구려인들의 한강유역 회복 의지와 더불어 신라와 隋의 연결을 차단해 자국 중심의 질서 회복에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려는 의도를 엿볼 수 있다. 또한 고구려와 백제가 신라라는 공동의 적을 가졌다는 인식을 제공하면서 고구려의 阿旦城 공략은 唐代에 고구려-백제-倭가 서로 연합하는 밑거름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결국 590년대 阿旦城 전투는 고구려 중심의 대외질서 회복을 위한 시발점이자, 7세기 발발된 동아시아 대전으로도 불리는 삼국통일전쟁의 始原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6세기 중반 국제정세 변동과 高句麗의 대응
Ⅲ. 580년대 遼西 지역의 동향과 高句麗의 영향력 확장
Ⅳ. 590년대 초반 高句麗의 세력권 회복 정책과 阿旦城 공격
Ⅴ. 맺음말
참고문헌
영문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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