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1905년 일본에서 부산으로 건너와 정착한 일본인 기업인 사카타 분키치의 조선 인식과 그가 주도한 전기부영운동의 성격을 파악함으로써 재조일본인 내부의 계층적 구별을 살펴보는데 목적이 있다. 식민권력의 대리자이자 식민지민이라는 이중의 정체성을 가지는 재조일본인은 식민권력과 식민정책 등의 작동 및 그 다양성을 면밀하게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 중에서도 식민지에 정주한 경제인들은 식민지의 지역성을 잘 드러내주는 집단이다. 부산의 대표적인 일본 기업인 사카타 분키치는 1876년 5월 후쿠오카현 야메군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산에서 곡물상 사카타상점을 운영하고 있던 아버지 사카타 요이치의 뒤를 잇기 위해 1905년 부산으로 도항하였다. 상점을 일임 받은 사카타 분키치는 점차 사업을 확장하면서 자본을 축적하였다. 또한 상점을 바탕으로 부산곡물시장, 경남미곡개량조합, 부산수산주식회사 등에서 요직을 맡아 상점 운영상의 이익과 자신이 정주하고 있는 지역의 이익을 추구하였다. 사카타 분키치는 업계에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부산거류민단회, 부산상업회의소, 부산부회 등 여러 공직 활동에 참여하였다. 그의 공적 지위는 부산의 ‘3대 거두’라고 일컬어지는 가시이 겐타로, 오이케 츄스케, 하자마 후사타로와 어깨를 견줄 정도였다. 사카타 분키치는 부산의 다른 경제인들과 마찬가지로 식민정책이 자신이 정주하고 있는 지역의 이익에 부합해야 더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따라서 지역의 현안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피력하며 지역에 이익이 되는 식민정책이 시행되도록 노력하였다. 지역의 이익을 중시한 사카타 분키치의 사회·정치활동 중 그의 조선인식이 잘 드러나는 활동은 전기부영운동이다. 그는 지역 본위의 조선와사전기주식회사(이하 와전)를 지향하였다. 그러나 회사의 설립과정에서 일본 자본이 유입되면서 와전은 회사 이익 중심의 경영을 하게 되었다. 이에 사카타 분키치는 전차만이라도 부(府)에서 운영하여 지역에 이익이 되었으면 하였다. 전기부영기성동맹회 회장으로서 부민운동을 주도하며 와전 매수 가격 협상 과정에 적극적으로 간여하였다. 와전 매수 가격 협상이 난항 끝에 매수가격 642만 엔에 위로금 30만 엔을 지급하는 도지사 조정안으로 타결되었다. 사카타 분키치는 ‘6월 19일 조정안’을 수용하고자 하였으나, 부민들의 반발에 부딪혔다. 그러나 그는 이미 매수 가격을 놓고 많은 대립이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조정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이러한 사카타 분키치의 조선에서의 활동은 자신이 정주하고 있는 부산의 이익 및 개인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부산의 이익을 위해서 전기부영운동 과정에서 조선인과 협력하기도 하지만 ‘6월 19일 조정안’ 수용 문제에 있어서는 부민과 대립한다. 즉 사카타 분키치는 지역의 이익을 중시한 식민지민이면서, 부산 내 일본인들의 이익만을 생각한 식민 권력의 대리자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