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의 연구목적은 사이타마현 하이가쿠의 특성을 고찰함에 있다. 하이가쿠라는 것은 편액(扁額)과 같은 판자에 하이쿠를 써서 신사와 사찰의 눈에 잘 띄는 곳에 봉납한 현판으로 주로 근세부터 근대에 걸쳐 전국적으로 번성했던 대중문화이다. 하이가쿠는 오늘날의 잡지나 신문의 문예란과 같은 역할을 하였지만 현재는 잊혀져가고 있다. 본 논문에서는 필자의 고향 사이타마현의 하이가쿠를 대상으로 지역별?시대별?유형별로 조사?분석하여 사이타마 지역의 현민성(?民性)과 사이타마현 6개 지역의 차이점을 규명하고자 한다. 선행 연구로는 먼저 우치노 마사히로(?野勝裕)의「가쓰라기 관음의 봉납 하이가쿠에 대해서」(桂木?音の奉納俳額について)를 들 수 있다. 우치노는 이 논문에서 모로야마마치(毛呂山町) 가쓰라기 관음당에 현존하는 하이가쿠 3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그 중 1매는 1836(天保7)년에 봉납된 것인데 비바람으로 인해 글이 옅어져 거의 읽을 수 없고, 관음당 마루 밑에서 발견된 또 다른 1매는 글자가 모두 지워져 해독불능 상태라고 한다. 그러나 관음당 서쪽 벽에 걸려 있는 것은 느티나무 판에 깊이 음각된 것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하여 탁본을 떠서 해독을 시도했다. 이 하이가쿠들은 1849(嘉永2)년에 봉납되었으며, 가와무라 세키후(川村碩布)의 수제자 고다마 이쓰엔(?玉逸淵), 무큐안 다이로(無窮庵太魯), 세후(靑布)를 판독자로 추대하여 인근 조손(町村)의 하이쿠 시인으로부터 하이쿠를 모집한 것이다. 또 우치노 마사히로의「하나미도의 하이가쿠」(花見堂の俳額)를 들 수 있다. 우치노는 이 하이가쿠의 하이카이사(俳諧史)적 의의에 대해 첫째, 1787(天明7)년에 봉납된 곳으로 사이타마현 내에서는 물론이고, 모로야마마치에서도 가장 오래된 하이카쿠라는 점, 둘째, 후카쿠사이 분리(不覺齋文里)라는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하이쿠 시인이 배출되었다는 점, 셋째, 38세의 세키후(碩布)가 하이쿠 시인으로서의 신출내기 시절에 료우테이(?雨亭)라는 호를 사용했었다는 점, 넷째, 모로야마 하이단(毛呂山俳壇)이 미요시노 하이카이권(三芳野俳諧圈)에서 슌주안 하이카이권(春秋庵俳諧圈)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 등을 지적했다. 또한 우치노는, 이즈모이와이(出雲伊波比)신사에 봉납된 3매의 하이가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첫 번째 하이가쿠는 사이타마현을 대표하는 하이쿠 시인 가와무라 세키후가 1835(天保6)년에 봉납한 것으로, 모로야마마치에 남아 있는 세키후의 하이가쿠로서는 유일한 것이다. 두 번째 하이가쿠도 1835년에 봉납되었으며 소코(楚江)를 중심으로 한 하이가쿠로 세키후가 봉납한 것과 쌍벽을 이루는 것이다. 이는 모로(毛呂)지역의 종장(宗匠)계승을 널리 알리는 의미도 담겨 있다고 한다. 셋 번째 하이가쿠는 슌주안(春秋庵)의 바이류(梅笠)가 봉납한 것으로, 바이류는 슌주안 3세를 자칭한 세키후와 슌주안 5세를 자칭한 가와가도무라(川角村)의 노구치 우류(野口有柳)를 잇는 시대에 모로지역에서 활약한 하이카이 종장들이다. 3매 모두 사이타마 하이카이사에서 귀중한 자료이며, 하이가쿠 축을 이룬 세키후(碩布)·소코(楚江)·바이류(梅笠)의 하이쿠를 각각 해독하였다. 이와 같이 우치노는 모로야마마치의 하이가쿠에 관한 논문을 2편 발표하였고, 모로야마마치 이즈모이와이신사의 3매의 하이가쿠에 대해서는 저서에서 언급하였다. 다음으로, 홍고 타미오의「도호쿠·홋카이도 하이가쿠 연구」(東北?北海道俳額の?究, 2016)를 들 수 있다. 그는 일본 전국에 분포되어 있는 하이가쿠의 지역적 특성에 착안하여, 도호쿠·홋카이도 지역의 하이가쿠 675매에 대해 현별·시대별·유형별로 고찰하였다. 현별로는 야마가타현의 하이가쿠가 244매로 가장 많았고, 그 다음으로 후쿠시마현 167매, 이와테현 56매, 아오모리현 52매, 아키타현 49매, 홋카이도 71매, 미야기현 36매 순이었다. 시대별로는 에도시대가 278매로 가장 많고, 그 다음으로 메이지시대 246매, 쇼와시대 60매, 다이쇼시대 45매, 헤이세이 3매, 불명 43매이었다. 이중 해독된 하이가쿠는 182매이며, 해독률은 약27%였다. 이 해독된 하이가쿠를 봉납 취지에 따라 유형별로 분류한 결과 법락하이가쿠 63매, 추선하이가쿠 52매, 기념하이가쿠 47매, 기원?보은하이가쿠 13매, 기타하이가쿠 5매였다. 또한 문화재로서의 하이가쿠, 하이가쿠와 경제의 관련 양상에 대해 논하는 등 하이가쿠를 다양한 측면에서 고찰하여 지금까지 연구되지 않았던 하이가쿠의 분포 상황은 물론, 하이가쿠의 특징을 밝힘으로써 하이카이사(俳諧史) 연구의 한 맥을 이루었다. 본 논문과 지역은 다르지만 필자는 여기에서 연구방법을 착안해서 작업해 나가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연구방법은 사이타마현 하이가쿠의 조사를, 현내의 모든 시정촌(市町村) 교육위원회의 문화재 담당 부서에 편지를 보내어, 봉서를 통해서 자료 제공을 의뢰하였다. 또 시정촌 문화재 담당부서에 신사와 사찰답사를 허가받아 1차 자료를 촬영하여 2차 자료와의 정합성을 가능한 한 확인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사이타마현을 6개 지역으로 나누어 제1장에서 동남부지역, 제2장에서 도네지역, 제3장에서 북부지역, 제4장에서 중부지역, 제5장에서 서부지역, 제6장에서 지치부지역을 다루었다. 그리고 각 지역별로 첫째 하이가쿠의 수량, 연대 등의 통계적인 숫자와 해독률, 둘째 지역 풍토나 역사와의 관계, 셋째 지역 하이쿠 시인의 계보와 중앙의 하이쿠 시인과의 관계, 넷째 하이가쿠에 기록된 하이쿠의 해석 및 감상, 다섯째 하이가쿠 봉납의 취지를 유형별로 분류하여 공시적?통시적 입장에서 고찰하였다. 하이가쿠 봉납의 취지는 다음의 5가지 범주로 대별된다. 즉 법락하이가쿠(A), 추선하이가쿠(B), 기념하이가쿠(C), 기원?보은하이가쿠(D), 기타하이가쿠(E)이다. 하이가쿠의 외면적·객관적 형식은 봉헌한 사람들의 내면적·정신적인 사상이나 감정의 발로이다. 그래서 하이가쿠 봉납의 취지를 유형별로 분류하여 각 시대의 특징이나 지역성을 객관적으로 고찰하였다. 사이타마현 동남부지역에는 34매의 하이가쿠가 있었다. 시대별로는 에도시대 14매, 메이지시대 12매, 다이쇼시대 3매, 쇼와시대 4매, 헤이세이시대 1매이다. 이 중 해독된 하이가쿠는 전체의 약 35.3%인 12매이다. 하이가쿠 봉납 취지를 유형별로 분류한 결과 법락하이가쿠 6매, 추선하이가쿠 3매, 기념하이가쿠 6매, 기원?보은하이가쿠 1매, 기념?위령하이가쿠 1매이다. 동남부지역의 하이가쿠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도시화된 하이가쿠가 3매 봉납되어있다. 둘째, 가스카베시(春日部市)에서는 에도에서 모실 수 없는 종장(宗匠)을 하이쿠 시인의 자택에 모시고, 하이카이문화의 혜택을 받은 것으로 추측이 된다. 셋째, 슈쿠바마치(宿場町)였던 소카시(草加市)의 하이가쿠에는 다양한 지역의 종장이 관여하여 여러 지역의 하이카이 유파가 유입되어 왔음을 엿볼 수 있었다. 넷째, 헤이세이시대의 하이가쿠는 신불을 직접 읊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으로 신성(神性)이나 불성(佛性)을 읽을 수 있었다. 다섯째, 지역의 하이쿠 시인 공동체의 유대를 엿볼 수 있었다. 또한 공통의 취지 아래 함께 봉납하는 기념하이가쿠가 많이 봉납되어 있었다. 하이가쿠는 피할 수 없는 공동체의 고통 속에서 함께 신불에게 아픔을 공유한다고 하는 의미의 봉납을 엿볼 수 있었다. 여섯째, 전쟁 중 검열을 피하고자 은유적 표현으로 속마음을 감싸 안았던 아픈 역사를 느낄 수 있었다. 동남부지역 하이가쿠의 마지막 특징은 기념하이가쿠에 나타나는 봉납취지의 이면성이다. 국가 앞에 경사형하이가쿠를 봉납한다는 외면적 취지와, 반항심을 간직하면서도 체념에 이르러 하늘에 오를 신령들을 위령한다는 내면적 취지가 엿보였다. 표면적으로는『종군하장』(從軍賀章)이지만 비통한 마음을 종군하여 사망하면 군신(軍神) 즉 영웅으로 신이 된다는 신앙으로 위로하고 극복한 것으로 추측이 된다. 사이타마현 도네지역에는 17매의 하이가쿠가 있었다. 시대별로 보면 에도시대 8매, 메이지시대 4매, 다이쇼시대 1매, 쇼와시대 4매이다. 이 중 해독된 하이가쿠는 전체의 약 59%에 해당하는 10매이다. 하이가쿠의 봉납 취지를 유형별로 분류한 결과 법락하이가쿠 5매, 추선하이가쿠 3매, 기념하이가쿠 1매, 기타(감사)하이가쿠 1매이다. 도네지역의 3매의 법락하이가쿠는 기념의 취지도 겸하고 있다. 도네지역의 하이가쿠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홋카이도·도호쿠에서는 다이쇼 시대 이후 신불형 법락하이가쿠가 1매도 봉납되지 않았으나 도네지역 교다시(行田市)에는 쇼와시대에 3매가 신불형 법락하이가쿠가 봉납되었다는 점이다. 이점은 아주 특수한 예이다. 둘째, 와카미야분교의 교사(若宮分校?)의 수선완료(修繕完了)를 기념하여 봉납된 준공형(竣工型) 기념하이가쿠에 올린 모든 작품에「와카(若)」「미야(宮)」「분(分)」「교(校)」「사(?)」자가 한 글자 이상씩 담겨져 있는 것으로부터 지역민들의 자신의 고장에 대한 깊은 애향심을 읽을 수 있다. 셋째, 구키시(久喜市)의 하이가쿠는 신주(新酒)가 무사히 빚어지는 것을 감사하며 봉납되었기 때문에 감사하이가쿠로 분류하였다. 넷째, 호레키기근(??飢饉)에 봉납된 하이가쿠에서는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고전적·해학적 하이가쿠를 봉납하여, 신불을 즐겁게 하고 기근의 조기 종식을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또한 이 하이가쿠는 미술공예형의 측면도 가지고 있어 하이가쿠의 내적인 미와 동시에 외적인 미를 추구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미야시로마치(宮代町)의 몬마(百間)지역의 특징으로서, 하이카이 문화의 활성화에 노력하다 1822년에 타계한 하이쿠 시인 난시(南枝)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해, 제자들이 1826년에 고샤신사(五社神社)에 봉납한 하이가쿠로 말미암아, 같은 지역의 후배 하이쿠 시인 2명이, 생전공양하이가쿠를 봉납하는 동기가 되었다. 사이타마현 북부지역에는 66매의 하이가쿠가 남아 있어 사이타마현 내에서 최다이다. 시대별로 보면, 에도시대 17매, 메이지시대 29매, 다이쇼시대 2매, 쇼와시대 3매, 헤이세이 3매, 불명 12매이다. 이 중 해독된 하이가쿠는 전체의 약 14%인 9매이다. 하이가쿠의 봉납 취지를 유형별로 분류한 결과 법락하이가쿠 4매, 추선하이가쿠 4매, 기념하이가쿠 1매이다. 북부지역의 법락하이가쿠 4매는 오락의 취지도 겸하고 있다. 하이가쿠에서 볼 수 있는 북부지역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당시 에도 하이단을 이끌고 있는 슌주안(春秋庵), 이세자(伊勢座), 에도자(江?座)의 중진들이 관여하고 있다. 이것은 호상(豪商) 도야 소우(戶谷雙烏)가 에도에 거처가 없어진 슌주안 2세 도코요다 조스이(常世田長翠)를 혼조시(本庄市)로 맞이하여 고미노안(小蓑庵)을 신축하여 8년간 흠모하고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둘째, 언어의 퍼즐처럼 서민오락으로서의 법락하이가쿠가 4매 봉납되었다. 셋째, 조상 대대로 하이가쿠를 봉납한 점을 들 수 있었다. 이시자와가(石澤家)는 보리사(菩提寺)인 도미타 후도사(富田不動寺)에 6대에 걸쳐 하이가쿠를 봉납했다. 4대째 이시자와 무초(石澤無腸)는 사이타마현 의회의장도 맡으면서, 렌쿠(連句)의 모임「심경회」(心耕?)를 주재해서, 패전으로 황폐해진 마을 청년들의 마음을 치유하고 지역의 부흥에 진력했다. 2010년에는 무초를 추모하는 제자들과 적손(6대째)에 의해 무초 33주기 추선하이가쿠와 렌쿠가쿠(連句額)를 봉납했다. 헤이세이시대에 추선하이가쿠가 봉납된 것은 홋카이도·도호쿠·사이타마 지역 중에서 요리이마치(寄居町)가 유일하다. 무초에 의한 학은(學恩)의 결실이, 이 하이가쿠와 렌쿠가쿠에 나타나 있다. 사이타마현 중부지역에는 57매의 하이가쿠가 있었다. 시대별로 보면 에도시대 21매, 메이지시대 18매, 다이쇼시대 6매, 쇼와시대 8매, 불명 4매이다. 이 중 해독된 하이가쿠는 전체의 약 26.3%인 15매이다. 하이가쿠의 봉납취지를 유형별로 분류하면 법락하이가쿠 7매, 추선하이가쿠 1매, 기념하이가쿠 5매, 기원?보은하이가쿠 1매, 기타 아름다운 경치를 예찬한 미경예찬(美景禮讚)하이가쿠 1매가 있다. 중부지역의 하이가쿠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양잠농가가 누에고치의 풍작을 기원하는 하이가쿠를 봉납했다. 양잠은 중부지역 농가의 부업이며 누에고치의 작황이 가계의 명암을 좌우하기 때문에 기원하이가쿠가 봉납되었지만, 동북 지방의 후쿠시마현은 양잠의 선진지역으로 부유층에 의해 봉납되었기 때문에 양잠예찬하이가쿠가 봉납되었다. 둘째, 북부지역에 이어 중부지역에서도 하이쿠 시인 이쓰엔(逸淵)이 스승 세키후(碩布) 7주기 추선 하이가쿠을 봉납한 사실이 밝혀졌다. 셋째, 이고팔경예찬(伊古八景??) 하이가쿠에는 미경예찬 43구가 봉납되었다. 그와 함께 하이카이 문화 발전을 기원하는 글이 함께 봉납되었다. 넷째, 중부지역의 하이가쿠 21?22(1935/쇼와10)에는 봉납할 때의 수지기록이 남아 있어 경비가 부족할 경우에는 주최 측이 부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이가쿠 봉납은 주최자 측의 경제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지역의 문화 수준 향상을 도모하려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고적한 사찰에는 사람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맑은 마음으로 창작한 하이쿠가 봉납되었다는 것이 하이가쿠에 드러나고 있다. 사이타마현 서부지역에는 68매의 하이가쿠가 남아 있었다. 시대별로 보면, 에도시대 16매, 메이지시대 40매, 다이쇼시대 3매, 쇼와시대 4매, 불명 5매이다. 이 중 해독된 하이가쿠는 전체의 약 73%에 해당하는 50매이다. 이 높은 해독률은 이루마시(入間市) 문화재연구동호회가 이룬 공적이 크다. 이루마시에는 50매의 하이가쿠가 봉납되어 시정촌별로는 사이타마현에서 가장 많으며 그 중 45매가 거의 완전히 해독되어 있으며 해독률은 90%이다. 하이가쿠의 봉납 취지를 유형별로 분류한 결과 법락하이가쿠 36매, 추선하이가쿠 2매, 기념하이가쿠 9매, 기원?보은하이가쿠 1매, 기타하이가쿠 1매이다. 법락하이가쿠 36매 중 2매는 경사형 기념을 겸하고 있다. 서부지역의 하이가쿠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신불분리령(神?分離令)이 나온 1868년부터 1889년의 대일본제국헌법에 의해 신앙의 자유가 인정될 때까지 약 21년간 20매의 하이가쿠가 신사에만 봉납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하이가쿠15-하이가쿠34). 둘째, 신불형 법락하이가쿠(A2)가 에도시대에 4매, 메이지시대에 4매 봉납되었으나 에도시대에는 봉헌·봉납이라고 적고 신불에 겸손하게 봉납하였는데 메이지시대의 신불형 법락하이가쿠에는 봉헌 글자가 생략되어 국가신도 사상이 깊게 반영되어 있었다. 셋째, 1873년에 교부성(?部省)에 의해 하이카이 교도직에 미쓰모리 미키오(三森幹雄)가 임명되어, 도쿄에 메린코샤(明倫講社)를 창설하여 러일전쟁 무렵까지, 메린코샤의 무사시노 지회회장(武?野支??長)을 맡은 이쓰엔의 제자의 제자인 세이코(?湖)가 큰 활약을 하였고, 작품 공개형과 공동체형의 법락하이가쿠의 봉납을 통해 지역의 문예활동 활성화와 국민선도에 힘썼다. 주최 측의 하이가쿠 봉납의 의도는 차치하고, 서민 입장에서는 하이쿠를 창작·투고할 기회가 주어져, 하이카이 문화가 지역사회로 확산되는 토양이 되었다. 추선하이가쿠는 2매이며 시라오(白雄)의 5주기, 세키후(碩布)의 7주기이며 2매 모두 하이쿠 시인 추선하이가쿠이다. 넷째,하이카이사형(俳諧史型) 기념으로 메린코샤 설립기념하이가쿠가 봉납되었다. 야세(野生)가 이 하이가쿠의 중심인물이며, 공동체 형식이라 사장 미키오를 기쁘게 하기 위하여 사원들이 봉납한 것으로 추측된다. 마지막으로 서부지역에는 비싼 소재를 이용한 미술 공예형 하이가쿠가 많이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기술적인 면과 함께 경제적인 면을 뒷받침하는 지역의 자원과 인재의 풍요로움이 보인다. 특히 메이지시대에 서양의 기술을 도입하고 싶지만 기독교에 대해서는 경계하고 있던 신정부에게 있어서 일본의 신불신앙으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하이가쿠라는 민속문화는 국가정책적으로 고마운 문화콘텐츠였을 것이다. 사이타마현 지치부지역에는 44매의 하이가쿠가 남아 있었다. 시대별로 보면, 에도시대 13매, 메이지시대 12매, 다이쇼시대 2매, 쇼와시대 8매, 헤이세이시대 1매, 불명 8매이다. 이 중, 해독된 하이가쿠는 전체의 약 18%인 8매이다. 하이가쿠의 봉납 취지를 유형별로 분류한 결과 법락하이가쿠 3매, 기념하이가쿠 4매, 기타 위무진혼(慰撫?魂)하이가쿠 1매이다. 지치부지역 하이가쿠의 특징은 지치부 사건이 발생한 1884년 경제가 곤궁한 가운데 봉기 직전에 하이가쿠를 봉납하고 있다는 점이다. 에도시대에는 자신의 몸을 희생해 고난에 처한 사람들을 구한 인물을 신으로 숭상하는 현상이 곳곳에서 나타나지만 거기에는 정치적 지위나 권력을 갖지 못한 서민층도 많이 포함되어 있다. 근세의 농민봉기(農民一揆)도 때로는 의민전승(義民?承)과 의민봉제(義民奉祭)를 계기로 일어났다. 소고신사(宗吾神社)에는 에도시대의 의민 사쿠라 소고로(佐倉?五?)가 모셔져 있는데, 소고로를 위령하여 신위를 떠받들고 민중 봉기의 성공을 기원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하이가쿠 봉납에서는 신령의 가호를 비는 한편, 만약 봉기가 실패하여 가족과 함께 처형된다 하더라도 소고로처럼 신으로 모셔진다는 서민들의 신앙체계를 엿볼 수 있다. 봉납된 하이가쿠의 대부분은 궁핍한 생활상황과는 무관할 수도 있겠지만, 죽음을 각오하여 ‘이제 곧 나도 자연으로 돌아갈 것이다’라는 순교자적 체념을 볼 수 있었다. 이는 동남부 하이가쿠의 종군하장(?軍賀章)과도 통한다. 에도시대의 의민전승이나 의민봉제는 계층에 관계없이 동일하게 신으로 모시는 야스쿠니 신앙체계의 원류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정치적 지위나 권력을 가지지 못한 서민층이 국가를 지켜 군신으로 모셔진다는 대의명분은 죽음의 권위를 신격화시켰다. 서민 신앙의 모태였던 신도가 군사체제 속에서 국가신도로 전환된 것이다. 즉 아버지인 천황을 위해 순국하여 영원히 군신으로 모셔질 것이라는 사생관 아래 비통함 속에서도 겉으로는 종군을 경하하는 하이가쿠를 봉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지치부지역의 하이가쿠를 연구한 모리야마 군지로(森山軍治?)는 “민중에 의해 받아들여진 하이카이의 정신은 냉엄한 현실을 견디기 위한 강한 정신을 길러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그 강한 정신을 통해 냉엄한 현실을 극복하는 힘이 되었다”고 말했다. 서부지역의 하이가쿠에서는 관동대지진 후 정월에 첫 서예를 할 때 ‘17자가 마음의 지팡이’라고 읊은 작품이 있기도 하다. 비통하기 짝이 없는데도 그 뜻을 대변해주는 것이 고전과 자연을 담은 17자인 하이쿠 작품도 있었다. 신사나 사찰에 봉납된 하이쿠를 통해 지금까지 기록되지 않았던 서민들의 간절한 마음의 소리를 들을 수가 있다. 지역민들은 하이가쿠를 봉납함으로써 신령을 위무진혼하고 부처를 즐겁게 할 수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이상과 같이, 사이타마현에는 286매의 하이가쿠가 보존되어 있었다. 시대별로 보면, 에도시대 89매, 메이지시대 115매, 다이쇼시대 17매, 쇼와시대 31매, 헤이세이시대 5매, 불명 29매이다. 이 중 해독된 하이가쿠는 전체의 약 36%에 해당하는 104매이다. 하이가쿠 봉납의 취지를 유형별로 분류한 결과 법락하이가쿠 61매, 추선하이가쿠 13매, 기념하이가쿠 26매, 기원?보은하이가쿠 3매, 기타하이가쿠 5매이다. 사이타마지역의 하이가쿠의 특성과 거기서 고찰되는 지역민의 특성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하이가쿠의 해독률이 높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사이타마현의 해독률은 약 36%이지만「도호쿠·홋카이도 하이가쿠의 연구」에 따르면 해독된 하이가쿠는 675매 중 182매이며, 해독률은 약 27%이다. 둘째, 동남부지역에서는 청일전쟁에 동원된 병사가 출정하기 전에 종군하장을 봉납하여 군신이 될 병사들의 영혼을 위무하는 위령하이가쿠를 봉납하였고, 도네지역에서는 생전공양하이가쿠를 죽음을 앞둔 두 명의 하이쿠 시인이 1870년과 1917년에 같은 신사에 봉납했다. 서부지역에서는 아직 마을 씨름 대회에서 이기기 전인데도 ‘이겼습니다, 감사합니다’라는 예축(予祝) 즉 미리 축하하는 하이가쿠가 봉납되고 있었다. 여기에서 무슨 일이든 미리 준비하고 축하 혹은 공양하는 지역성이 드러난다. 셋째, 도호쿠·홋카이도에서는, 앞 세대의 하이쿠 시인 몇 주기 추선이라고 하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도록 봉납하지만, 사이타마현의 경우, 거의 추선이라는 표기가 없다. 그래서 봉납자 중에서 중심 역할을 맡은 하이쿠 시인의 사승(師承) 관계를 거슬러 올라가서, 그 스승이 타계한 해부터 역산해 보아야만, 추선임을 알 수가 있다. 이와 같은 추선하이가쿠가 동남부 1매, 북부 1매, 중부 1매, 서부 2매이다. 지금까지 하이카이사(俳諧史) 연구는 주로 하이쿠 모음집, 하이쿠 잡지, 서간(書簡)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일반적으로 스승의 3주기, 7주기 등에는 추선구집을 편찬하지만 세키후 7주기에 수제자인 이쓰엔이 추선구집을 남기지 않아 불분명하였으나 이번 사이타마현 하이가쿠의 조사를 통해 이쓰엔이 북부와 중부에 추선하이가쿠를 각각 봉납한 것이 밝혀졌다. 하이가쿠에 분명히 ‘세키후 7주기 추선’이라는 표기가 없었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조사 연구에서 간과된 것으로 보인다. 넷째, 북부지역에서는 슌주안 2세 조스이를 혼조시로 모셔 고미노안을 세우고 거점을 제공한 소우, 동남부지역에서는 가난한 승려 모습의 마스다 민규(?田眠牛)를 가스카베시로 모셔 쌀가게 주인 이세헤(伊勢平) 등 에도에 머물 곳이 없는 종장을 모시는 지역 사람들이 있었다. 사이타마는 도쿄의 문화인에게 풍부한 자연과 전망 좋은 풍경으로 마음의 평안과 함께 삶의 거처를 제공하고 있었다. 다섯째, 북부지역 요리이마치의 무초는 렌쿠의 모임인「심경회」를 주재하여, 패전으로 황폐해진 마을 청년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마을 부흥에 진력하여, 20년간 현(?) 의회의원이나 의장으로서 문화재 활성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도네지역 미야시로마치의 몬마지역에서는, 농사일을 하면서 동문 사람에게 하이카이를 가르치고, 하이카이 문화를 지역에 확산시킨 난시, 서부지역 이루마시에는 하이카이가 번성하는 것을 기뻐하며,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밤낮없이 메린코샤의 사원을 지도했던 야세 등, 세상의 눈에 띄지는 않으나, 주위 사람들을 보살피는 것을 즐겨하는 사람을 중심으로 하이가쿠 커뮤니티가 형성되었다. 여섯째, 슈쿠바마치인 소카시 하이가쿠에는 다양한 지역의 종장이 왕래하였으며, 여러 지역의 하이카이 유파(流派)가 들어왔음을 알 수 있었다. 구로시오(黑潮)와 오야시오(親潮)가 만나는 곳에 물고기가 풍부한 것처럼, 슈쿠바마치에는 도시의 문화와 다양한 지역의 문화가 유입되어 지역의 풍요로운 경제적 토양 속에서 하이카이 문화가 형성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일곱째, 바다 저편에서 해마다 정해진 시간에 찾아오는 기러기 등 철새에게 영력을 부여하고, 매년 같은 시기에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는 식물이나 부는 바람에서 느낀 신성과 불성을 하이가쿠에 표현하였다. 여기서 규칙과 약속을 소중히 여기는 기질을 엿볼 수가 있었다. 여덟째, 한 인간의 죽음은 남은 인간의 삶에 영향을 주는 것이 엿보인다. 북부지역에서는 무초의 지도를 받은 제자들에 의하여 추선하이가쿠가 봉납되었다. 도네지역에서는 난시의 지도를 받은 제자들에 의하여 추선하이가쿠가 봉납되었다. 이는 이 지역 후배 하이쿠 시인 2명이 생전공양하이가쿠를 바치는 동기가 되었다. 추선하이가쿠는 살아있는 자에 의한 이승과 저승의 가교라 할 수 있겠지만, 스스로 하이가쿠에 이름을 새기고 생전공양을 한 사람들은 미래를 대비하여 장래 가교를 만들어 놓고 간 것이다. 아홉째, 사이타마지역에서는 에도시대에는 독실한 신불형 법락하이가쿠, 메이지시대에는 국가신도예찬 하이가쿠가 봉납되었으며, 고도경제성장 후의 하이가쿠에서는 에도시대보다 섬세하고 풍부한 정신세계가 담긴 하이가쿠를 볼 수 있었다. 신불을 직접 읊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으로 신성과 불성을 본 것이다. 한편 동북·홋카이도지역에서는 다이쇼시대 이후 신불형 법락하이가쿠가 1매도 봉납되지 않았다. 열째, 도시화된 하이가쿠가 확인되었다. 민속문화의 원형이 변화하는 모습에 대해서 농촌의 원형으로부터 도시생활에 알맞은 형태로 변화시켜 유지되고 있는 사례 등에서「도시화된 민속」을 찾아낸 지바 도쿠지(千葉?爾)의 시점에서 보면, 색지나 범포(帆布), 백판(白板)을 사용한 색지 하이가쿠?범포 하이가쿠?백판 하이가쿠는「도시화된 하이가쿠」라 할 수 있다. 이처럼 하이가쿠는 정보 전달의 측면에서 보면 많은 사람들의 협력과 경제적?시간적 부담이 커서 비합리적이라고 볼 수 있지만, 유형민속문화재의 관점에서 보면 봉납의 취지에 법락?추선?기념?기원?보은이라는 보편적 유형을 가진 문화유물이며, 지역적 특성으로서 위령?감사?미경예찬 등의 특수성이 있다. 또한 하이가쿠는 문화유물로서 산 자와 죽은 자의 가교이자 당시 공동체의 아픔을 공유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이가쿠는 개인적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유대를 이루는 표현의 수단이며, 여기에 선인(先人)들의 상상력과 창의성을 엿볼 수 있다. 하이가쿠는 당장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100년, 200년의 세월을 거치는 가운데 과거에 내걸린 기도는 미래인에게 마음의 지팡이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