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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미술사학회 미술사학연구(구 고고미술) 美術史學硏究 第252號
발행연도
2006.12
수록면
81 - 116 (3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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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종 스님들의 묘탑(墓塔)으로 조성된 나말여초 대부분의 승탑 탑신에는 불교의 대표적인 외호신 중(外護神衆)인 제석(帝釋)ㆍ범천(梵天)과 사천왕상(四天王像)이 부조로 새겨져 있다. 본 논문에서 대상으로 하고 있는 9세기 중반에서 11세기 초반까지의 20여 작품을 볼 때, 이 시기에 세워지는 승탑에 유독 신장상이 많이 새겨지게 되는 것은 당시 선종이 융성했던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듯하다. 왜냐하면 신장상은 부처와 불법을 수호하던 역할을 맡고 있는데, 스님의 사리를 모신 탑에 이들 상들이 등장하고 있는 것은 선사의 위치가 부처와 동격으로 간주되었음을 드러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신장상 가운데 특히 제석 신앙은 고대에서부터 왕권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며 절대왕권을 합리화하는 배경이 되어 왕실을 중심으로 신앙되어 왔는데, 선종의 승탑에 이러한 제석과 범천, 사천왕을 표현한 것도 선사의 위상을 높이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가장 먼저 승탑에 신장상이 나타나는 것은 844년의 염거화상탑(廉居和尙塔, 국립중앙박물관소장)인데 여기에는 사천왕상만 등장하고, 제석ㆍ범천상은 아직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데 사천왕상 중 서방 광목천상은 8세기 후반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경주 능지탑(陸旨塔)의 12지신상(十二支神像)의 유상(酉像, 닭)과 얼굴을 제외하면 거의 도상이 일치한다. 특히 갑옷 밑으로 늘어진 소매가 표현된 것은 승탑 사천왕상과 왕의 무덤 주위에 두르는 12지신상의 갑옷 표현에서만 등장하고 있고, 탑이나 사리기, 석등 등의 사천왕상에서는 등장하지 않는 표현이다. 이러한 새로운 발견을 통해 승탑의 사천왕상은 8세기 왕실 조각인 12지신상을 모델로 하였을 것으로 짐작해 보았다. 또한 승탑 사천왕상이 불탑에 부조된 사천왕상과는 명확히 구별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 반면 왕실조각인 능묘 12지신상과 일부 공통되는 조형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 승탑이 왕실의 후원으로 만들어졌을 가능성을 제시하고 이를 뒷받침해주는 선사들의 비문과 기타 여러 사료들을 검토하였다. 즉, 승탑은 왕릉을 조영하던 석공(石工)이 왕실의 후원 아래 승탑을 조영하였을 가능성을 조형 상으로 추정하고, 전하는 선종 스님들의 비문을 통해서 왕실에서 선시들을 예우한 사실과 선종을 지원한 많은 사례들을 조사하였다. 이와 같은 연구 결과 당시 선종의 위상을 보다 분명하게 자리매김할 수 있었으며, 또한 막연히 선종 미술을 대부분 지방 호족과 연결 짓던 기존의 시각에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할 수 있었다.
또한 승탑 탑신의 신장상 배치 형식을 통해 탑신 방향이 잘못 놓여져 있는 예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제석천은 승탑 탑신의 팔각면 중 동쪽면에, 범천은 서쪽면에 배치되며 사천왕상은 각기 존명(尊名)에 따라 간방위(間方位)에 배치되는 일정한 형식을 보이는데, 본 논문에서 대상으로 히는 20점의 작품 중 8기의 승탑 탑신이 현재 거꾸로 놓여 있거나 정확한 방위를 향하고 있지 않았다. 그 동안 탑신 방향이 잘못 놓여 있어 도상에 혼돈을 야기시켰으나 이를 바로잡음에 따라 서방 광목천상이 일정한 시기에 탑을 지물로 들고 나타나기도 하며, 고려시대 945년경 이후의 승탑에는 모두 사천왕 지물로 활과 화살이 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남아 있는 선사들의 비문에는 선종 스님이 입적한 시기와 비를 세운 연대가 밝혀 있어 이들 신장상의 연대를 추정히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그러므로 이들 신장상들은 연대가 있는 나말여초 조각상으로서 신라 하대와 후삼국기, 고려 초기의 조각양식을 살피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나말여초 승탑 신장상들을 통해 파악되는 이 시기 양식은 다음과 같이 그 흐름을 정리할 수 있다. 우선 1기(844--860년경)의 염거화상탑(廉居和尙塔) 신장상 계열에서는 신체 비례 및 양감이 이상적이며 탄력이 느껴지는 호형(弧形)의 신체 곡선을 가지는 등 유연한 포즈를 취한다. 이것은 860년대 초까지 신라 전성기의 양식, 그중에서도 특히 8세기 말-9세기 초의 십이지상 양식의 영향을 잇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이 계열의 태안사 적인선사탑(泰安寺 寂忍禪師塔, 861년) 신장상에서부터 시작된 장신화(長身化) 경향은 2기(860-890년경)로 이어진다. 이 시기 쌍봉사 철감선사탑(雙峰寺 澈鑒禪師塔, 868년) . 보림사 보조선사탑(寶林寺 普照禪師塔, 880년) . 연곡사 동탑(?谷寺 東塔)신장상에서는 양감이 평판적으로 변하고 적극적으로 장식화되는 경향을 띤다. 이 시기 비교되는 작품은 867년의 축서사 석조비로자나불상으로 소매에서 보이는 평행밀집 계단형 주름은 쌍봉사 철감 선사탑의 띠주름 갑옷과 비교된다. 이 불상의 작은 얼굴이나 대의 끝자락의 꽃장식 등에서 보이는 장식화 경향은 쌍봉사 철감선사탑 계열에서 더욱 적극적으로 발전된다. 이러한 장식화 경향 속에서도 봉암사 지증대사탑(鳳巖寺 智證大師塔, 883)신장상에서처럼 양감을 어느 정도 잃지 않는 양식이 후대 후삼국 양식으로 전해져 3기 후삼국기(890-960년경)에는 단구형(短軀形)의 신체 비례를 가지면서 얼굴 및 신체에 통통한 양감을 가진다. 또한 수철화상탑(秀澈和尙搭, 893년경, 現在 증각대 사탑으로 지정됨) 신장상에서부터 얼굴이 커지기 시작하여 3기에 해당하는 후삼국기의 상들은 대체로 얼굴이 크다. 이 시기에 보이는 단구형의 신체 비례는 940년 태조 왕건이 발원해서 만든 개태사 삼존불에서도 보이는 후삼국기의 한 양식이며, 또한 개태사 상에서 보듯이 얼굴과 손발이 커지는 경향 역시 이 시기의 양식이다. 고려 초인 4기 (970-11세기 초)에는 원통형의 밋밋한 단구형의 신체에 과장된 부피감을 보이지만, 거돈사 원공국사탑(居頓寺 圓空國師塔, 1018-1025) 신장상에 이르면 이와 같은 불안정한 양감은 사라지고 세련되고 차분한 저부조 수법이 등장하며, 신체 양감은 극도로 제한되는 반면 상호 표현에서 양감이 과도하게 몰리는 새로운 양식이 표현된다. 이러한 양식은 1010년의 명문(名文)이 있는 예천 개심사지 석탑 팔부중을 비롯하여 다수의 작품에서 보이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고려의 양식으로 완전히 정착된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적인선사탑, 증각대사탑, 보조선사탑 신장상 등에서 보이는 신라 하대 말기의 침울한 얼굴 표정과 대조적으로 수철화상탑(893년경)이나 광자대사탑(廣慈大師塔, 945-950) 신장상의 밝게 미소짓는 표정에서는 새로운 시대를 여는 기대감과 새로운 양신의 태동을 느낄 수 있다. 지역적으로 신라 하대 미술은 호남지역과, 후삼국기 및 고려 초기에는 중부지역의 미술과 관련된다. 이상과 같은 흐름을 통해서 볼 때 나말여초 신장상의 양식은 신라 중대 양식을 이어 각 시기마다 그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한 것으로 생각된다.
본 연구는 승탑에 표현된 신장상의 조형적 분석과 관련 비문을 통해 선종이 유행했던 나말여초의 시대상을 좀더 구체적으로 파악하여 보았다. 승탑 신장상의 양식 변화를 통해서는 나말여초 조각의 흐름을 통일신라 중대 양식의 발전선상에서 파악하여 보았다. 본 연구에서는 승탑 조성 세력으로 왕실의 후원 가능성에 좀더 무게를 두었는데, 이는 신라 하대 양식을 일률적으로 지방 호족의 지원 아래 조성된 지방 양식으로 보는 견해에 대해, 왕실의 후원 아래 중앙 양식과의 관련 속에서 나말여초 양식 변화를 포착해 보았다는 데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Important Buddhist tutelary deities such as Indra , Brahma and the Four Heavenly Kings were calved on most funerary monuments made for Seon Buddhist monks during the transitional period between late Silla and the early Goryeo On twenty such stupas from the period between the middle of the 9th century and the 11th century examined in this study. tutelary deities were carved mainly under the auspices of Sean Buddhism in this era.
The first incidence where tutelary deities appeared is a stupa for Master Yeomgeo made in 844. The figure of Vir?p??k?a among the Four Heavenly Kings calved on this monument is quite similar to the figure of a chicken deity among the twelve zothac figures at the so-called Neungjit'ap in Gyeongju presumed to have been built in the late 8th century Remarkably long sleeves under the armour represented in these two monuments are not seen in any other funerary monuments. reliquaries, stone lamps: they were probably derived from the twelve zothac figures on royal tombs. This suggests that masons who worked for the construction of royal tombs were also responsible for calving monks' stupas under the patronage of the royal family This supposition is also supported by the epigraphical evidence. The inscriptions are quite helpful for dating monuments, for they usually record the dates of the death of a monk and of the erection of the monument, Thus, the tutelary deities carved on the monuments are important art historical documents for the sculptural style of the period.
The characteristics of these monuments are summarized in the following: In the first phase (c. 844-890), the proportion and three-thmensional qualities are remarkably idealized, At the same time. the bothes shaped like a bow take various pliable forms. These seem to reflect the influence of the style of the twelve zothac figures from the period between the late 8th century and early 9th century The tendency to make bodies elongated originated in such monuments as the stupa for Master Jeogin (861) in Taean-sa and continued through the second phase (c. 860-890). During this period, as we can see in Master Cheolgam's stupa (868) in Ssangbong-sa, Master Bojo's stupa (880) in Borim-sa and the eastern stupa of Yeongok-sa, the volume was flattened and the relief became significantly decorative. Parallel stair-type folds seen on the sleeves of a Vairocana Buddha image (867) in Chukseo-sa is comparable to the folded armor in Master Cheolgam's stupa. The decorative tendency visible in a small face and floral patterns on the bottom of robe was more distinct in Master Cheolgam's stupa In Master Jijeung's stupa (883) in Bongam-sa voluminous features are retained, which show affinities with the style of the Three Kingdoms period. Thus, during the third phase (c. 890-960) the figure became short in proportion with chubby volumes of face and body. Most tutelary deities of this phase have bigger heads, the tendency that started in Master Sucheol's stupa (c. 893). In the fourth phase (970-early 11th century). which continued to early Goryeo the volumes of round and slender body were exaggerated. In Master Wongong's stupa (1018-1025) in Geodon-sa such unstable volumes were diminished as a more refined and reserved technique creating low relief appeared: as a result a new style emerged in which volumes were significantly reduced except for a face. TI1is style is found in many examples such as a stone stupa at the Gaesim-sa site datable 1010 according to an inscription and d1is indicates that it was firmly established in the Goryeo period.

목차

Ⅰ. 머리말
Ⅱ. 승탑 신장상의 배치 형식
Ⅲ. 나말여초 승탑 신장상의 조성배경과 조형적 시원
Ⅳ. 나말여초 승탑 신장상의 양식 변천
Ⅴ. 맺음말
국문초록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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