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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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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藏書閣 제19집
발행연도
2008.6
수록면
39 - 67 (29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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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헌종대 慶嬪 金氏의 혼례를 중심으로 조선후기 후궁 가례의 절차와 변천을 고찰하였다. 조선시대 국가 典禮集에는 왕비, 왕세자빈, 왕세손빈, 왕세제빈, 대군, 공주, 옹주, 사대부가 등의 혼례를 규정하고 있지만 후궁 가례에 관해서는 생략하였다. 그러나 조선후기 후궁의 가례는 숙종ㆍ영조ㆍ정조대를 거치면서 점차적으로 체계화되었다. 숙종대 淑儀 金氏의 입궁을 계기로 獨牢宴과 국왕, 대왕대비, 중궁에 대한 朝見禮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영조대에 『國婚定例』에 「淑儀定例」편이 별도로 실렸다. 한편, 1778년(정조 2)에 元嬪 洪氏를 맞이하면서 정조는 혼례의 격식을 왕비의 것보다 낮추면서도 궁인 출신의 후궁의 경우와 구별하여 높였다. 원빈 가례에는 納采, 納幣, 冊嬪의 의식이 추가되고, 책빈례에서 竹冊과 銀印이 만들어질 정도로 높아졌다. 한편, 경빈 김씨 가례는 〈納采-納幣-宣敎命-朝見大殿-同牢宴-翌日朝見〉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이것은 왕실 혼례의 육례 중 告期와 親迎이 생략된 불완전한 혼례였다. 이 가례에서 혼인을 상징하는 기러기가 등장하지 않았으며, 책례에서는 원빈의 혼례에서 보였던 冊文과 印綬가 생략된 채 敎命文만이 수여되었다.
조선후기 후궁 가례는 후궁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과 함께 상대적으로 높아진 사대부가 후궁의 지위를 보여준다. 왕비와 후궁으로 엄격히 구별된 조선시대 상황에서 후궁이 왕비에게만 주어진 부부의 예를 공유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경빈 김씨 가례가 왕실 혼례임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인 혼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상징들이 생략된 것은 왕비와 상대적으로 낮은 후궁의 지위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경빈 가례는 부부로서의 상징이 결핍된 의식이었지만 궁인 출신의 후궁과는 차별지어 자신의 지위를 높이려고 한 사대부가의 후궁 지위를 나타내고 있다.

목차

요약
1. 서론
2. 조선후기 후궁 가례의 역사적 추이
3. 慶嬪 金氏의 가례 절차
4. 결론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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