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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수태 (충남대학교)
저널정보
서강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서강인문논총 西江人文論叢 第26輯
발행연도
2009.12
수록면
101 - 135 (35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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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중대 이후 비로소 문제가 된 포용의 문제에 대한 신라 정부의 한계는 하대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의 정치적 성격이 귀족연립정치로 규정된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진골귀족들이 내부적으로는 분열하고 대립하면서도, 6두품이나 지방호족의 등장 등에 대해서 포용하지 않고 연합해서 대응을 했으며, 6두품이 멸망될 때까지 이러한 입장을 고수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후삼국의 시대에 들어가면 그동안 배제되어 오던 지방호족과 6두품이 역사의 새로운 주인공이 되었다. 특히 왕경인이 아닌 아주 변방인인 개경의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였다는 사실은 크게 주목된다.
이에 고려는 포용에 대한 본격적인 고민과 대책을 새롭게 보여주어야만 했다. 태조 왕건의 호족연합정책은 그 한 단면을 알려준다. 이 보다 고려의 신분제타보다 구체적 양상을 보여준다. 향리에서 문반으로, 천민에서 군언을 거쳐, 무반에 이르는 신분상승이 부단히 이루어졌던 것이다. 신분의 상승이 전혀 허용되지 않았던 신라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이것은 고려가 지배세력의 사회적 기반의 확대와 함께, 신분제도에서 신라사회와 다른 역사적 발전을 보여준 측면이다.
고려사회가 여러 포용책을 시행하여 갈등을 해소하고 통일성을 강화하려고 노력하였지만 그 안정성은 항상 위협받고 있었다. 가장 큰 위협은 무반으로부터였는데, 그것은 무신의 난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뒤이어 후삼국이 고려라는 하나의 국가로 통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삼국의 옛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여전히 남아 있던 분립적인 요인이 삼국의 부흥운동으로 다시 나타났다. 이때의 삼국부흥운동은 모두 실패하였다. 무신란과 농민반란으로 정치적 행정적 역량이 크게 감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가 이와 같은 움직임을 충분히 잠재울 수 있었던 것이 다. 이후 이와 같은 양상은 다시 우리 역사에 나타나지 않게 되는데, 삼국시대 이래의 분립적인 요인이 향토의식으로 흡수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고려사회에 들어와서 배제보다 포용의 정신이 그만큼 역사적 대세로 자리를 잡게 되었음을 말해준다고 하겠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배제의 거부 : 원술
Ⅲ. 포용의 한계 : 진표
Ⅳ. 나머지 말 - 포용 정신의 계승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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